4년 만에 비행기를 탔다

봉인 해제된 나의 시간

by 진심과 열심

다시 돌아온 여행자로서의 감각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 건 2019년 11월 말 뉴욕이었다. 당시 서른이 된 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 일 년 동안 휴가를 쓰지 않고 연차 15개를 모았다. 그렇게 뉴욕에서 보스턴, 워싱턴을 지나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3주간 여행을 다녀왔다. 그해 12월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내게서 여행의 시간은 꽤 오래 멈춰 있었다.

이번에 팀 워크숍으로 제주도를 오게 됐고, 4년 만에 비행기를 탔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오랜만에 여행자로서의 감각을 느끼고 싶어 캐리어를 끌었다. 여행이 무척 오랜만이라는 게 이렇게 티가 나는 걸까. 국내선 출국장에 있어야 했는데 나 홀로 국제선 출국장에서 팀 분들을 기다렸다.


내게 집중하게 되는 비행의 시간

비행기에선 가능하면 창가 자리에 앉는데, 이번에도 밖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고 싶어 창가를 오래 바라보았다. 오직 비행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하늘에서 대지를 내려다보는 감각을 좋아한다. 구획된 땅의 모양을 바라보는 것도 평온하게 바다 위를 활주하는 배를 보는 것도 좋다.


비행기가 구름 사이를 통과한다. 평소에 견고하게 보이던 구름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옅은 존재라는 걸 오랜만에 느꼈다.


비행기 안에서 임경선 작가님의 신간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마지막 장을 읽었다. ‘삶의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나보다 훨씬 냉철해 보이는 작가님께서도 “가면 갈수록 ‘직감’이나 ‘직관’으로 선택하고 싶어진다(173쪽)”고 하셔서 놀랐다.

스무 살 이후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모두 근거라고는 전혀 없이, 오직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직감에 의해서만 해왔다. 덕분에 선택에 후회가 남지 않았고, 이 무모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계속 비논리적으로 선택하며 살아도 되나 약간의 고민이 있었는데, 명쾌한 해답을 얻어서 좋았다.


평소엔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어도 여러 자극에 금방 집중력을 잃곤 하는데, 비행하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일상에서도 ‘비행기 모드’를 적극 활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책도 다 읽고 그간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도 조금은 되돌아봤기에 어느 정도 마음이 충만한 채 착륙했다.


금성이 나를 비추고 있었어

워크숍 첫날 마지막 코스는 백약이오름 야간 트랙킹이었다. 저녁 7시 해 질 무렵에 출발해서 오름 정상에서 일몰을 보았다. 트랙킹을 가이드해주신 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모든 정성을 다하는 ‘일터의 장인’이셨고, 덕분에 돗자리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준비해주신 복숭아 아이스티까지 마시며 여유롭게 석양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 위로 금성이 너무나 선명하게 반짝였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자연스레 힘들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이 다 지나가고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황홀하고 감사했다. 제주도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서늘한 바람결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힘든 일이 지나가면 이렇게나 좋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 당시에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미래를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다는 게 기쁘고 벅찼다. 힘든 시간에도 금성은 나를 가만히 비춰주고 있었을 거다. 다 지나간다고, 매일 내가 너를 반짝반짝 빛내주고 있다고….


무척 호사스럽고 환상적이었던 시간. 이날의 밤을 오래오래 잊지 못할 거 같다.


우리 함께 벽을 허물어요

요 며칠 브런치에 쓴 글이 노출되어 조회수가 급등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누군가 알아봐준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전에 회사 책을 홍보하는 글을 써서 많은 사람에게 읽혔던 감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전히 내가 이룬 성취니까.


작년에 유병욱 카피라이터님의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미션을 안내해주고 과제를 함께해 나가는 강의였는데, 가장 인상적인 과제는 ‘벽 허물기’였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는데 오래 기억에 남았다. 당시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크고 작은 벽들에 대해 끄적여보았는데 10개 정도가 있었다.

올해 6개월이라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으니 그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벽을 뚫어볼 작정이다. 첫 번째는 글쓰기, 두 번째는 운전, 세 번째는 아직은 밝힐 수 없는 비밀 영역.

방송작가 때부터 출판 편집자로 일하는 지금까지 ‘글’을 다루며 살고 있지만, 언제나 글쓰기가 두려웠다. 꿈과 직결되어 있어 잘 쓰고 싶었지만, 그 중압감이 오히려 점점 더 글쓰기를 회피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잘하고 싶은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나를 비난하는 악순환이 계속 벌어졌다. 이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내게 기회를 줄 작정이다. 누가 바라보지 않아도 꾸준히 사진을 찍어 기록했던 '비비안 마이어'처럼 나도 누가 보든 말든 뚜벅뚜벅 써나가려고 한다.


이번 기회에 브런치에 글을 쓰고 계신 분들에 대해서도 더 알게 됐다. 800편이 넘는 글을 쓰신 분들도 있었다. 그 성실함에, 꾸준함에 놀랐다. 자신의 시간이 온전히 투영된 글 목록을 볼 때면 얼마나 뿌듯하실까.

내 글이 포털 사이트에 노출되었다는 걸 발견한 후,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던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 시도하면 변화할 수 있어요”라고.

두려웠던 게 무엇이든, 멈춰 있던 게 무엇이든 내가 나의 봉인을 풀어주자. 그렇게 우리 함께 벽을 허물어보자. 겁내지 말고 딱 한 걸음씩만, 잘하려는 부담은 내려놓고 산책하듯 편안하게. 결국 벽은 허물어지게 돼 있고 그 벽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내가 건너갈 수 있는 다리를 직접 놓아주자.


세 개의 벽을 뚫게 해달라는 소원을 제주도 곳곳에 빌었다. 안녕 제주. 고마웠어. 다음에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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