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미안해
소라 목에 걸린 두꺼운 쇠줄. 나랑 장난칠 때 그 줄이 스치면 나조차도 무게감에 아팠다. 이 정도면 소라 목에는 얼마나 무리가 갈까? 목디스크가 걸리지는 않았을까. 게다가 이 쇠줄은 겨울이면 차갑게 변해 소라를 더 춥게 만든다. 소라에게서 당장 쇠줄을 없애주고 싶었지만, 만약 그래서 소라가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소라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 인정한다. 비겁한 변명이다.
그래서 처음에 내가 선택한 건 소라의 삶의 반경을 넓혀주는 거였다. 쇠꼬챙이에 고정된 체인을 한 줄 풀 때면 적어도 10cm 이상 줄 길이가 늘어난다. 너무 줄이 길어서 방해된다고 아빠가 이야기해서 가끔 아빠의 눈치를 보며 몰래몰래 줄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소라의 삶의 반경이 10cm씩 넓어졌다.
묶여 있으니 소라는 최대한 줄이 멀리 닿는 곳에, 자신의 영역을 최대한 침범하지 않는 곳에 소변과 대변을 누었다. 이것만 봐도 개가 얼마나 깔끔한 동물인지 알 수 있다. 지금도 아이들 산책을 하며 묶인 개들을 본다. 자세히 보면, 아이들은 진짜 끈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대소변을 눈다. 어떤 아이는 점프해서 집과 분리된 곳에 대소변을 누었다가 다시 점프해서 복귀한다.
그런 면에서 뜰창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공간인지 알 수 있다. 좁디좁은 곳에 갇혀 있는 것에 모자라서, 발을 제대로 디딜 수도 없어 발 변형이 오는 것에 모자라서, 밑에 대소변이 계속 쌓인다. 사람보다 1만 배나 후각이 예민한 개가 1년 치 2년 치 계속 쌓인 대소변 냄새를 맡고 그 위에서 먹고 자며 사는 거다. 대체 그 개들이 무슨 잘못을 지었을까.
지금도 1미터로 묶인 개들을 보면 그 아이들을 구원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주인에게 소리치게 된다. ‘제발 똥이라도 제때제때 매일매일 치워달라고. 개는 인간보다 더 깔끔하다고. 그러니 제발 죄 없이 형벌을 받는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존엄성은 지켜달라’고 말이다. 물론 나도 할 말은 없다. 소라의 대소변은 매일 치워주었지만, 소라는 우리 집에서 1년 정도 1미터의 삶을 살았다.
내 일상에서 소라가 차지하는 영역이 점점 커졌기에 진돗개 관련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다가 ‘진돌이TV’ 채널을 발견했다. 가장 인기 있는 영상에는 “평생 묶여 있던 개한테 첫 산책을 선물”했다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영상을 보기 전엔 진돌이가 생애 첫 산책을 얼마나 행복해할까 하는 생각과 산책의 즐거움을 맛본 후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막상 진돌이는 날뛰는 것도 없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면서도 인솔자를 엄철 잘 따랐다. 너무나 해맑게 좋아하는 표정을 보니 감동이었다. 소라도 산책을 하면 얼마나 좋아할까? 소라가 좋아할 표정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당시 산책줄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었기에 다이소에서 가장 저렴한 세트로 자동 리드줄과 가장 큰 사이즈의 하네스를 도합 만 원 주고 샀다. 그러곤 내 방에 숨겨 두었다가 주말에 들고 갔다. 엄마에게 진돌이 첫 산책 영상을 너무 재밌게 봤다고 계속 이야기하며 그렇게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은근슬쩍 그 도구를 꺼냈다. 매리 산책을 하고 싶어서 샀는데, 한번 해보면 안 되냐고 부모님이 솔깃할 수 있도록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빠가 재밌어 보인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고 소라에게 적극적으로 하네스를 채웠다. 그렇게 소라의 목줄이 풀렸다. 어떤 두터운 쇠줄도 연결되지 않은 채 처음으로 천 재질의 끈으로만 소라가 연결됐다. 그리고 아빠가 산책줄을 잡았고 소라의 거동이 자유로워졌다. 바로 밭 옆의 등선으로 소라가 조금씩 천천히 걸었고, 익숙해졌을 무렵 뛰기 시작했다. 낯선 땅 냄새를 킁킁 맡았고, 눈빛은 빛났고 이게 뭐지 하는 표정으로 걷다가 본능에 이끌려 허둥지둥 영역 표시를 연신 해댔다. 우리를 끌고 가는 소라가 살짝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아빠가 생각했을 무렵 약 5분 정도의 첫 산책이 끝났다.
그날 이후로 매일 조금이라도 산책을 해주자고 부모님을 꼬드겼고, 나는 온라인으로 산책줄을 또 하나 구입했다. 그렇게 조금씩 소라를 산책시켰는데, 처음 1개월간은 소라가 달려가는 대로 끌려만 갔기에 진땀을 뺐다. 내 힘으로 제어가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잠시 길거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세상을 깨닫게 된 소라는 산책을 가고 싶다고 우리만 보면 호소력 있게 울었다(하울링을 했다). 이렇게 소라와의 매일 산책이 시작되었고 소라는 조금씩 산책에 익숙해졌다. 나 역시도 어느 정도 소라와 합이 맞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줄리어스 k-9이라는 산책줄과 하네스가 튼튼한 브랜드를 알게 되어, 이 핫핑크색 하네스를 하고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소라와 온전히 누렸다.
30분 정도의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서 다시 산책줄에서 두터운 쇠줄로 갈아줄 때, 소라가 반항을 하면 어쩌지... 하는 불순한 생각을 창피하지만 했었다. 그런데 소라는 목줄을 당연하게 받아주었다. 고마웠다. 이렇게 지금까지 소라는 매일 산책하는 개가 되었다. 사랑받는 개로, 매일 산책하는 개로 키우고 싶었던 내 바람은 이뤄졌다. 매일 산책이 당연하다고 인지할 무렵 소라는 실외 배변을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의 공간에 아무것도 배설하지 않았다.
소라의 무거운 쇠줄이라도 바꿔주고 싶었다. 이후 아빠와의 타협으로 가벼운 와이어줄로 소라의 목줄을 바꿔줬다. 이 와이어줄은 훨씬 가볍고 생각보다 튼튼하다. (지금 이 글을 읽었을 때 당신이 아는 개가 무거운 쇠줄을 목에 차고 있다면 제발 줄이라도 바꿔주기를 바란다. 만 원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다.)
이후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로 천장에 레일을 만들어 소라의 목줄과 연결해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이라도 소라가 조금 더 멀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줬다. 천장에 와이어줄을 연결하는 원리인데 ‘실외견 와이어 도드래’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쉽게 방법을 알 수 있고 설치비용도 2~3만 원 내로 저렴하다. 소라가 아이들을 낳기 전까지 소라는 이렇게 삶의 반경을 조금씩 넓혀갔다.
지금은 한 번에 40분 정도의 산책 코스가 확립되었고 이렇게 매일 2번 산책을 한다. 우리가 산책하는 코스에만 묶여 있는 개 6마리를 만난다. 모두 다 하나같이 반짝반짝 예쁜 아이들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주인이 산책을 해주는 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산책하며 아이들과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기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방치한 개들 똥을 대신 치워주다가 주인에게 걸린 적도 있다. 이 아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면서도 실제로 내가 하는 거라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비는 것뿐이다. ‘건강하게 해주세요. 조금 더 행복하게 해주세요’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