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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May 29. 2023

나를 살리러 온 나의 구원자

사람이 개를 구원하고 개도 사람을 구원한다

나라는 사람의 가장 큰 확신

어렸을 때는 10년, 2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리곤 했다. 대학생 때만 해도 5년 후의 미래를 제법 구체적으로 그렸고 노트에 인생 그래프를 끄적였다. 그런데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리던 미래와 엇나가게 되었고 또 그 어긋남이 나쁘지는 않아서 막연한 미래를 계획하는 대신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단거리에만 초점을 맞춰 살다 보니 이제는 당장 1년 후 아니 6개월 후의 내 모습도 그려지지 않는다. 1년 뒤의 나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삶의 방향이 꽤 구체적으로 정해졌는데도, 일상의 확실성과는 반비례하듯 미래가 전혀 가늠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불안이 찾아와 ‘너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냐고, 이게 맞는 거냐’고 나를 뒤흔든다. 많은 것이 불확실하지만,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내 모습이 단 한 가지는 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의 보호자로서의 삶이다. 지금처럼 산책하고 예뻐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보며 내가 행복해할 거라는 사실을 단 1%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금은 나은 보호자가 되려고 노력할 거라는 것도. 나라는 사람의 가장 확실한 모습이다.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것 중 변치 않는 사실이 단 한 가지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들 덕분에 내 삶이 단단하게 뿌리내린 느낌이다. 일상에서 가장 확실한 행복, 우리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코로나19가 극심한 시절이었다. 코로나19를 겪으며 많은 사람이 일상의 단절에서 오는 갑갑함을 느꼈다고 했지만, 나는 예외였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그해 2021년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을 육아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아이들과 발걸음을 맞추고 아이들의 첫 산책을 기록하며,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상이 충만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때 아이들과 함께한 추억이 내 머릿속 한편에 몽글몽글 기분 좋게 저장되어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내겐 파라다이스다.


내 일상의 구원자·치유자·수호자

‘구원(救援: 구원할 구, 도울 원)’이라는 단어의 뜻은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이다. 아이들이 나의 구원임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 때가 있다. 꼬박 일 년 전 이맘때 지옥의 시간을 걷고 있었다. 회사에서 벌어진 어떤 일로 영혼이 말살되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의 소용돌이가 6개월간 지속되었고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단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어 17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여러 번 걸어 내려갔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웃으며 밥을 먹을 수 있는 마음 상태가 되지 않아, 지하 식당에서 울면서 혼자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도 눈물방울이 마스크 안으로 툭툭 떨어졌고, 집에 오면 이불을 덮고 숨죽여 울었다. 당연히 잠도 이루지 못했고, 다음 날이면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일어나 붉게 물든 두 눈이 얼른 가라앉기만을 바라던 나날이었다.


내 존재 자체를 내가 부정하게 되었던 순간들, 영혼이 절규하던 그때 돌이켜보니 그 힘들었던 터널을 아이들 덕분에 무사히 통과한 것 같다. 6개월간의 시간 자체가 통으로 불행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일하다 감정이 밑바닥으로 내리칠 때면 아이들 사진이 큰 치유제가 되었고, 매일매일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기뻤고, 주말이면 아이들과 산책하며 마치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상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주중에 아이들 산책은 엄마가 매일 두 번씩 해주신다).


숨 막히던 하루에도 아이들로 인해 내가 웃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절대적으로 지지해주는 존재들. 아이들은 내 일상의 구원자를 넘어 치유자, 수호자가 되었다.

확신한다. 만약 아이들이 없었다면 내 모습은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아이들을 산책시키는 데 체력이 문제없도록 꾸준히 움직이려고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멋진 언니가 되려고 노력한다. 또 아이들 양육비용을 내가 직접 버니 월급이 끊이지 않도록 일도 감사히 열심히 하게 되었다. 나의 일상에 든든한 구심점이 되는 아이들의 존재가 고맙다. 아이들이 벌써 커서 씩씩하고 의젓한 모습을 볼 때면 부모의 마음으로 대견하다. 아이들 이름인 ‘소라, 희망, 기쁨, 사랑’이란 단어는 내가 가장 기쁘게 말할 수 있는 단어다. 이 단어를 부르는 순간, 떠올리는 순간만으로도 내게 행복이 차오른다.


나를 보며 하염없이 꼬리를 흔들어주는 존재. 내가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알려준다. 나를 살리러 온 나의 작은 구원자들. (사진은 아이들 중 가장 몸집이 큰 희망이)


삶이 달라진 개들의 찬란한 모습들

지금 경복궁역 안 ‘서울메트로미술관 1관’에서는 〈소피 가먼드 구출견 사진전〉을 하고 있다(2023년 5월 28일부터~6월 1일까지).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HSI, Humane Society International)이라는 단체를 통해 구출된 개들을 모델로 한 사진전이다. ‘소피 가먼드’는 동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진을 찍는 작가라고 한다. 아이들에게 ‘목줄’이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를 지니는 만큼 목줄을 멋지게 장식해 사진을 찍어주었다.


전시에서는 강아지들의 이전 삶과 바뀐 삶이 동시에 보인다. 개식용 농장에서 한 번도 순수한 물을 마신 적 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배설물과 뒤엉켜 자고, 뜬장 위에서 땅도 밟지 못하고, 발 살갗이 다 벗겨진 채로 동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만이 영원한 출구였던 개들의 삶이 이렇게 사람으로 인해 달라졌다.

배우 다니엘 헤니가 이 단체를 통해 입양한 줄리엣 역시 개농장에서 구조되었다. 다니엘 헤니는 아직도 가끔 줄리엣이 먼 허공을 응시할 때면 혹시나 예전 농장에서의 끔찍한 일들이 떠올랐을까 봐 걱정한다고 한다. 미국으로 입양 간 한 아이 이름을 고향을 떠올릴 수 있도록 ‘소주’로 지어준 것도, 이름 자체가 ‘자유’인 강아지의 사연도 슬프고 기뻤다.


다니엘 헤니가 입양한 줄리엣의 찬란한 지금과 어두웠던 과거. 줄리엣은 지금 라스베이거스에 산다. ⓒ 소피 가먼드 구출견 사진전
보스턴으로 입양 간 '소주'와 캘리포니아로 입양 간 '자유'. ⓒ 소피 가먼드 구출견 사진전


농장 폐쇄까지 장장 5년간 끊임없는 설득 과정이 있었다고 한다. 농장주에겐 엄청난 생계유지 수단이었을 텐데, 이 단체는 그들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이 과정이 궁금하고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진다. 전시엔 농장주 이야기도 잠깐 등장하는데 마지막 구조 날 농장주는 처음으로 개들을 ‘무게’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줬다고 한다. 또 어떤 농장주는 더 이상 동물을 해치는 개식용 산업에서 벗어나 건축 일을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개식용 금지가 내가 증오하는 이 농장주들의 삶도 어쩌면 구원해줄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전시장 한편엔 이 전시의 메인 모델인 애비의 과거 모습을 사람들의 포스트잇 메모가 모여 현재 모습으로 바꿔주는 관객 참여 공간이 있었다. 애비의 변화가 한눈에 보여 뭉클했다. 그래서 나도 “얼른 이 상황이 해결되기를,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하고 메모 하나를 남겼다.   

분명 사람은 개를 구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개들 역시 사람을 구원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다.


전시의 메인 모델인 애비의 현재와 과거. 식용견으로 길러지던 애비는 지금 미국 버지니아에서 가족들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 소피 가먼드 구출견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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