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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May 31. 2023

사람에게도 개의 꼬리가 존재한다면

마음을 투명하게 표현한다는 것

강아지에게 꼬리라는 신묘한 영역 

아이들이 아주 작은 핏덩이로 태어났을 때, 그 작은 몸에도 발톱 모양이 하나하나 온전하게 보인다는 점이 경이로웠다. 아이들의 신체 중에서도 가장 신기한 건 나에겐 없는 ‘꼬리’였다. 내 두 번째 손가락만 한 크기로 엉덩이 끝에 아기자기하게 달려 있는 꼬리. 아이들이 커서 이 꼬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 무척 궁금했다.   

  

각자 다른 특색을 지닌 꼬리들. 기쁨이와 사랑이는 꼬리가 반원으로 꼬부라지고, 희망이는 공작새의 깃털처럼 꼬리가 길고 탐스럽다. 소라는 꼬리가 일자로 쭉 뻗어 올라간다.


강아지에게 꼬리는 ‘나 지금 기분 대따 좋아, 싫어, 무서워, 두려워’ 하고 기분을 상중하 혹은 더 세분화해서 솔직하게 표현해주는 수단이다. 사냥 본능을 발동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면 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병원에 갈 때면 아예 꼬리가 엉덩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다. 극강의 좋음과 싫음이 꼬리에서 분명하게 티가 난다. 그래서 나는 이 꼬리를 보며 아이들의 감정 상태를 쉽게 알 수 있다. ‘아 지금 산책이 만족스럽구나’, ‘오랜만에 나를 봐서 기쁘구나’, ‘이 상황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구나’ 하고. 이미 아이들은 얼굴에서도 진심을 표현하지만 이 꼬리로도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절대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      


최고 기분이 좋을 때의 소라, 병원 진료를 앞둔 희망이. 꼬리가 쏙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인간에게도 꼬리가 장착된다면 

아이들과 산책할 때면 여러 기분 좋은 공상이 떠오른다. ‘인간에게도 꼬리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마음을 숨기기 쉬운 인간에게,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신체가 생긴다면 말이다. 거짓말 탐지기가 없어도 그 사람이 예의상 하는 솔직하지 않은 말들을 걸러낼 수 있어 좋을 거 같다.

아니다. 만약 인간에게도 꼬리가 있다면, 인간은 그 꼬리마저도 통제하려고 할 테다. 그 꼬리가 보이지 않도록 꼬리를 봉합하는 수술을 개발하거나, 꼬리를 덮는 옷들이 유행할 거다. 그래서 솔직한 자기 자신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거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나의 솔직한 민낯의 감정’을 드러내는 거니까.    

  

얼마 전 용산에 있는 한 책방에서 《슬램덩크》를 오후 내내 몰아서 읽은 적이 있다. 이날 내가 앉은 곳 아래층에서는 북토크 모임이 열렸는데, 우연히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어떤 참여자분께서 “이젠 마스크가 없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나는 그 정도는 아닌데, 자기표현을 하는 게 굉장히 어려우신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되새겨보니 나 역시도 그랬다. 내가 표정을 풍부하게 짓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즐거울 때가 아니면 내내 표정을 꽁꽁 숨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아침에 회사에서도 기쁘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나도 모르게 고요한 분위기에 짓눌려 무표정하게 인사하게 된다. 웃지 않는 모습이 전문가처럼 보인다고 착각하는 걸까, 왠지 쿨해 보이고 싶은 내적 욕망인 걸까.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무표정을 내 얼굴의 기본값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면 눈과 입 근육이 어색하게 움직인다. 웃음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내게도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란 인간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절대 티 내지 않는다. 내 마음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확신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확신이 생겨도 갖은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또 두들겨 보다가 돌다리 자체가 사라지거나, 언제 돌다리가 있었나 싶게 더 깊숙한 곳으로 마음을 뭉개버리고 만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딱 하나, 상처받기 싫어서 그 감정과 상황을 외면하는 거다.


《슬램덩크》 캐릭터 중에 강백호를 가장 좋아한다. 농구에 대한 진심도 소연이에 대한 마음도 투명하게 보여주니까. 자신을 농구 천재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소심한 겁쟁이인 나에게는 멋져 보인다. 꾸밈없이, 스스럼없이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부럽다.

〈알쓸인잡〉에서 김영하 소설가가 “사랑 고백은 인간이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순간이다”라고 했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먼저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니, 굉장히 긴장 상태에 있다가 그중에 누군가 지기로 결심한 거다”라는 말에도 깊이 공감했다.

나에게도 꼬리가 생긴다면, 더는 머리로 마음을 재지 않고, 감정을 포장하지 않고 투명하게 내 마음을 내보일 수 있을까. 그렇게 나의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을까.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투명한 사랑을 전합니다

개를 키우기 전에는 의사 표현이 분명한 고양이와는 달리, 개는 모든 걸 다 좋다고 받아들여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밥이 먹기 싫으면 고개를 홱홱 돌리는 통에 “제발 한 입만 먹어주세요” 하고 사정하면서 먹일 때가 많다. 목욕하기 싫을 때면 강력한 하울링을 발사하기에 멈칫하게 된다. ‘싫으면 싫다’, ‘나 지금 산책하러 가고 싶다’ 하고 의사 표현을 확실하게 한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넘어가는 나이기에 단호하게 의사 표현하는 법도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서 가장 닮고 싶은 건 사랑을 투명하게 전하는 거다. 세차게 꼬리를 흔들어주는 것도 모자라, 어서 와서 안아 달라고 배를 뒤집어 내게 손짓한다. 개에게 배는 가장 취약한 곳이므로 믿는 사람에게만 보여준다고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내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취약성을 용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다른 걸 하고 있으면 어느새 내 곁에 와서 쓰다듬어달라고 철퍼덕 눕기도 하고, 입에 장난감을 물고 와 ‘나를 주목해주세요. 사랑해주세요’ 하고 맑은 눈으로 말을 건넨다. 이렇게 아이들에게서 순도 100퍼센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는 투명한 사랑. 그렇게 당당히 사랑을 건네는 아이들이 위대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왜 자꾸 감정을 포장하고 사는 걸까. 사람이 AI도 아니고 감정을 내보이면 망가지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일상이 한결 더 가뿐해지지 않을까. 좋으면 좋다, 두려우면 두렵다, 싫으면 싫다, 행복하면 행복하다, 기쁘면 기쁘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조금은 더 감정을 표현하고 표출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비록 우리에게 꼬리는 없지만, 우리에게도 반짝이는 두 눈과 환한 미소와 다정한 언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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