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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Jun 03. 2023

죽은 고양이와 개를 묻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넓어진 나의 세계

아무도 치우지 않는 사체

고백하자면 개들을 집에서 키우고 있지 않다. 집에서 차로 10분, 자전거로 25분 걸리는 곳에 아이들이 있다. (이 글들을 다 써 내려갈 즘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이 넓은 집으로 독립하기를 꿈꾼다.) 아이들을 만나러 짧은 도로를 오갈 때, 죽어 있는 동물들을 마주하곤 한다. 맞다. 로드킬 당한 거다. 올해는 다행히 한 건도 없지만, 2022년 한 해만 고양이 여섯 마리를 땅에 묻었다. (추가- 2023년 9월 고양이 두 마리와 새 두 마리를 묻어줬다.)

되도록 죽은 생명체의 모습을 면밀히 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래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머리에서 피가 흐르던 고양이, 장기가 밖으로 다 나와 있던 고양이, 전날 저녁에 치였는지 땅에 얼어붙어서 떼어지지 않던 고양이…. 엄마와 나는 죽어 있는 동물들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서로 암묵적인 사인을 주고받는다. 그러곤 박스와 삽을 챙겨 다시 그 길을 간다.

우리가 아이들을 묻어주는 과정은 이렇다. 죽은 동물이 묻힐 땅을 탐색하고(최대한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진 곳), 박스를 평평하게 펴서 그 위에 사체를 올려 이동한 뒤, 땅을 파서 묻어준다. 그 후 다른 동물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도록 박스를 덮어주고 돌이나 나무 더미로 고정한다. 이렇게 아이들을 박스에 담아 땅에 묻어주기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엄마가 다 하시고 내 역할은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살피는 수준이다.      


연고 없는 동물들이 묻힐 수 있는 땅

한 번은 이른 아침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발견했고, 곧바로 도구를 챙겨 다시 고양이를 만나러 갔다. 마침 한적한 곳 소나무 아래 푹신한 땅이 보여 고양이를 묻어주려고 했는데, 어떤 차 한 대가 가지 않고 계속 우리를 주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는 우리에게 “그거 묻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 땅의 주인이었던 거다. 우리가 경솔했다. 그 땅에 주인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자기 땅에 죽은 고양이가 묻히는 게 싫을 수 있다. 이해한다.

우리는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주인이 없는 땅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결국 평평한 평지를 놔두고 비탈길에 고양이를 묻었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이 경사진 비탈길은 국가 땅이라고 한다. 고양이가 불운하게 세상과 작별했는데, 죽어서도 불편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사람에게도 국가의 수혜가 필요하듯 아무 연고가 없는 죽은 동물에게도 필요한 건 공유지, 국가 땅이었다.

이렇게 아이들을 묻을 때면 ‘미안해. 좋은 곳에서 좋게 태어나’ 하고 잠시 명복을 빌어준다. 엄마와 내가 이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딱 하나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으니까. 그대로 두면 수많은 바퀴가 안쓰러운 죽음 위를 또 짓밟고 갈 테니까. 한 번의 짓눌림이라도 막아주고 싶었다. 얼른 영혼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최대한 빠르게 그 상황을 해결해주고 싶다.    


시멘트에서 흙으로, 대지와의 연결  

우리가 묻어준 동물은 개보다 고양이가 월등히 많다. 그래서 개를 묻어준 기억은 잔상이 더 오래 남는다. 한 번은 엄마가 아이들을 산책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긴가민가하다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밭을 고를 때 쓰시는 길쭉한 갈고리를 들고 길을 나섰다. 장마가 와서 농수로에 물이 많이 차올랐고, 엄마의 말처럼 불어난 물에 무언가 둥둥 떠 있었다. 엄마가 갈고리를 넣어 물속에서 그 갈색 물체를 꺼내셨다. 얼굴 형체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엉덩이에 꼬리가 선명하게 달려 있었다. 작은 삽살개 같았다. 이 개 역시 비탈진 국가 땅에 묻어주었다.     


또 한 번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변길 산책로를 갈 때마다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구간이 있었다. 어느 날 그곳을 내려가니 그건 리트리버의 사체였다. 오래 방치되어 보였다. 리트리버처럼 큰 개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품종의 개가 죽어서 산책로 한 가운데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엄마가 리트리버 몸 위로 흙을 덮어주었다.

죽은 동물들을 땅에 묻어줄 때마다 김완 작가님의 《죽은 자의 집 청소》 책이 떠오른다. 2020년 내게 최고의 책이었고 여전히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인생 책이다. 죽은 이들의 뒤를 정리해주는 일. 사체는 땅에 닿아야 부패가 시작되고 그래야 세상에서 흔적이 사라진다. 이 동물들의 몸을 생명을 품어주는 흙과 닿게 해주는 것이 그나마 그들을 위로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흔적은 누군가 해결해주지 않으면 계속 남아 있다. 내 육신도 마찬가지일 거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보이지 않는 죽음들

차를 운전할 때면 검은색 비닐봉지만 봐도 심장이 덜컹거린다. 어느 날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작은 뱀이 짓이겨져 죽음에 다다른 것을 보았다. 내가 자전거를 타지 않았더라면, 또 바닥을 유심히 보지 않았더라면 발견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만약 운전을 하고 같은 길을 통과했다면 몸집이 작은 뱀의 죽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다. 뱀들의 활동이 많아지는 계절엔 이렇게 로드킬 당한 뱀도 많이 목격한다.


모든 계절을 좋아하지만, 여름 중에 싫어하는 날이 있다. 초복, 중복, 말복. 이 ‘삼복(三伏)’이라 불리는 ‘복’ 자가 들어가는 날들이 싫다. 몸보신을 이유로 많은 개들이, 닭들이 이날을 위해 더 죽어갈 테니까.

개식용 금지가 그 어느 때보다 올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아직 미비한 법안이지만 개를 키우는 입장에선 당연히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슬픈 이야기도 들린다. 개를 먹는 게 말이 많고 까다로워지자, 개 대신 염소를 더 많이 먹게 되었다는 거다. 도심에서 살짝 떨어진 시골에서 아이들을 반려하다 보니, 염소 농가를 만나기도 한다. 그때마다 우는 염소의 소리를 들었다. 마치 아기가 “응애 응애” 우는 거 같은 흐느끼는 소리였다. 산책 중 만난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염소들 엄마가 사라져서 우는 소리”라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반경이 넓어졌다

아이들 덕분에 수많은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더 많이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세상이 더 넓게 보인다. 자연스레 생긴 습관들도 있다. 여름철 매미가 힘이 빠져 바닥에 뒤집혀 있으면 나무에 올려준다. 지렁이가 누군가의 발에 밟힌 채 몸이 나뉘어 버둥거리면 그중 살아 있는 몸을 나뭇가지로 들어 올려 외진 땅에 놓아준다.

2년째 비건 지향으로 살고 있다. 생선도 우유도 계란도 먹는 페스코테리언으로 살고 있기에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계속 지속하게 만드는 건 아이들의 힘이다.

엄마와 나는 안다. 개를 키우며 우리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생명에 대한 오지랖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을. 사랑하는 존재가 미치는 영향력은 이렇게나 크다.


개를 키우지 않았다면 이 세계가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나보다 더 너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너희들. 항상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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