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풍요롭게 맘껏 누리기
개들은 품종을 막론하고, 자신이 규칙적으로 산책하러 나갈 수 있다는 걸 지각하는 순간 실외 배변을 시작한다. 본능적으로 먹고 자는 생활공간에서 배변을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외 배변하는 개를 키운다면 하루에 2~3번 밖에 나가는 건 필수다.
강아지의 실외 배변은 인간에게도 이롭다. 저절로 밖에 나가 움직이게 되기 때문이다. 실외 배변하는 강아지를 키우는 보호자들 사이에선 이런 농담을 나누곤 한다.
“다이어트하고 싶으면, 식단 조절? 약? 다 필요 없어. 실외 배변하는 강아지 키우는 게 짱이야” 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부나 밖으로 나가야 하기에 강아지의 실외 배변은 보호자를 부지런하게, 건강하게 만든다. 지금은 살짝 달라졌지만, 나 역시 원체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내 일상에서 이렇게 규칙적으로 산책하는 습관은 절대 생기지 않았을 거다. 항상 다른 우선순위들을 핑계로 뒷전으로 밀어냈을 테니까. 아이들 덕분에 ‘산책의 맛’을 알게 됐다.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맑은 날 아침에 산책하면, 내 기분이 정말 끝내주게 황홀해진다는 사실도.
강아지 산책은 보호자에게 ‘계절을 누리는 삶’을 선사한다. 특히 내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산책로엔 논과 밭, 들판이 어우러져 있기에 온전히 계절을 감각하고 누리는 행운을 얻었다. 덕분에 봄에 꽃이 피는 순서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됐고(산수유→목련→개나리→벚꽃→철쭉 순) 농사의 순서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산책하다 차 도로 위에 생뚱맞게 지나가는 돌게도 보았고, 백로는 거의 매주 일상적으로 만난다.
6월 초인 지금은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는 시기다. 내가 여름이 되기 전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다. 모를 심기 전에 논에 물이 가득 채워지면, 마치 바다에 온 것 같다. 햇살에 물이 반짝반짝 빛나면 덩달아 내 삶도 윤이 나는 거 같다.
벼가 조금씩 익어가면 언젠가부터 농약을 뿌리는 드론을 마주한다. 그렇게 가을이 오면 벼를 수확하는 장면을 직관한다. 트랙터가 얼마나 빠르게 벼를 수확하는지 보고 있으면 놀랍다. 벼 수확을 마치고 나면 푹신한 볏짚이 남는다. 그 벼 카펫 위를 거닐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웃으며 지켜본다. 조금 있으면 소문을 들었는지 벼 이삭을 먹으러 기러기 떼가 찾아오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볏짚은 소여물 용도로 돌돌 말려 휑해진 논 한가운데 자리하게 된다. 어느새 쓸쓸해진 정취를 느끼고 있으면 곧 겨울이다.
여전히 우리에게 주식인 쌀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고 느꼈다. 귀중한 무언가가 결실을 맺는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위안받았다.
신도시 키즈인 나는 어린 시절 자연을 풍부하게 느끼고 자란 사람들이 늘 부러웠다. 이런 사람들의 몸에는 자연의 색채가 물들어 있어 대체할 수 없는 생각과 감각, 감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무언가를 감각한 기억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 정도밖에 없는 나로서는 내 어린 시절 경험이 풍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웠다. 그런데, 지금 서른이 넘어서 그 과정을 누리고 있는 거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뚜렷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이 일상의 풍요가 황홀하다.
산책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먹고 자는 것 외에 매일 365일을 지속하게 하는 힘에 대해서. 일상에 수많은 예측 불가능한 일이 생기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날마다 아이들과 산책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하루에 기본 2번씩, 1년이면 730번 이상의 산책을 한 거다.
아이들에게 산책 줄을 입히는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렇게 내게 체화된 행동은 또 뭐가 있을까. 매일 밥 먹고 씻고 머리 감고 양치하듯 산책이 당연한 일상이 된 게 너무나 신기하다.
〈오마이뉴스〉에 삼풍백화점 사고의 생존자분께서 연재하신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사고 후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17년간 병원에 다니셨는데 어느 날 정신과 의사분께서 개를 처방해주셨다고 한다. 개 때문에라도 집 밖에 나가라는 의미였다. 이분께서 개를 키운 후 자신에게 생긴 변화에 대해 쓰신 글을 원문 그대로 옮긴다.
“실외 배변을 선호하는 개랑 살다 보니 눈 뜨면 무조건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미래의 일을 앞당겨 걱정하거나 과거의 실수를 되짚어 보는 건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또 개랑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안 쓰던 몸을 쓰니 어찌나 매일매일 피곤하던지 약을 따로 먹지 않아도 눈만 감으면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며 잤다. 개와 함께 사니까 전보다 확실히 웃을 일도 많아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선생님 말이 맞았다. 내겐 개가 필요했다.”
나 역시 아이들로 인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있다. 주말에 아이들과 산책하면 자연스레 하루에 14,000보 이상을 걷게 된다. 이 시간들이 일할 때 교정지와 골몰하는 시간도 버티는 체력을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