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분을 채우는 시간

그렇게 매일을 살게 하는 순간들

by 진심과 열심

무언가 마음에 남았을 때 아침에 일기를 쓰는 편이다. 문장도 문맥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날것의 감정을 생각나는 대로 블로그에 적는다. 그렇게 속 시원히 다 털어놓은 후에 비공개로 저장한다. 오늘 아침에도 노트북을 켜서 최근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끄적이고 있었는데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라? 나는 늘 나를 채워준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구나!’ 하고.

동시에 〈나의 해방일지〉 미정의 대사가 떠올라서 대본집을 찾아보았다.


미정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 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다가 ‘아,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싱긋)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미정의 말처럼 이번 주에 나를 채워준, 또 살게 해준 순간들을 잊지 않으려 기록해 두고자 한다.


작은 호의가 열어준 기분 좋은 하루

얼마 전 출근길 버스에서 노트북을 켜고 제목 안을 쓰다가 깜빡 졸았다. 어느덧 버스는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고, 빠르게 내리려는 사람들 대열에 끼는 게 늘 어려웠기에 맨 나중에 내려야지 하고 일어서서 앞을 보며 잠시 멍때렸다. 그런데 뭔가 사람들의 움직임이 정체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제야 내 옆을 쳐다보았다. 내 옆에 앉았던 남성분이 나를 향해 웃어주셨다. 내가 먼저 내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두고 계신 거였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에 얼떨떨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회사로 향했다.

요즘 동시에 두 권의 책을 진행하며 여러 바쁜 일들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 작은 호의로 힘들었던 모든 게 누그러진 것 같았다. 그렇게 거의 2~3분의 시간이 채워진 채 하루를 시작했는데, 하루가 다 충전된 듯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도 최근에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런 호의를 베푼 적이 있었나 하고. 잘 기억나지 않았다.


먼 곳의 누군가와 마음이 닿은 순간

지금 준비하는 한 권의 책은 영미 도서로 마감 전에 저작권사 컨펌이 필요하다. 출간을 준비하는 사이 미국 아마존에는 개정판이 나왔고, 이 개정판에 두 챕터가 추가 되었다고 해서 확인차 개정판 원고를 받았다. 그런데 본문 내용과는 거의 상관없는 요리법이 담겨 있어 오히려 기존 내용의 몰입감을 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법이 한국 문화와 맞지 않아 넣지 않겠다는 의견을 전하며 표지 컨펌을 요청했다.

며칠 후 저작권사에서 답변이 왔고 표지 컨펌이 되었나 싶었는데, 개정판에 추가된 원고를 꼭 넣어주길 바란다는 예상 밖의 답변이 왔다. 그것도 미국에 계신 저자분이 직접 써서 전해준 듯한 답변이었다.

보통 외국 저자분이 직접 답변을 주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깜짝 놀랐고 더 놀란 건 이분의 이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100세를 앞두고 계시고,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내신 분이었다.

완강한 의견이기에, 내가 잘못 판단한 건 아닌가 싶어 편견 없는 눈으로 다시 검토해 보았는데도, 굳이 개정판의 추가 원고를 담는 건 아니라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간단히 의견만 다시 보낼까 싶다가, 저자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 번 글을 수정하며 우려하는 점에 대해, 어떻게 책을 만들 것인지에 대해 편지 쓰듯 답변을 보냈다. 마음속으로는 ‘설득이 안 되면 어떡하지? 마감이 코앞인데 그러면 번역도 다시 해야 하고 마감일도 미뤄야 할 텐데’ 하고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에이전시로부터 “의견 주신 건 모두 저자 승인되었습니다. 순조로운 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누군가를 설득해서 컨펌이 난 것도 기뻤지만, 전혀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분과 마음이 닿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이분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쓰셨는데, 두 권의 번역서 모두 내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엄청난 내적 친밀감만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연결되다니 뭉클했다.


하루 5분을 채우는 의미

이렇게 작은 호의와 진심이 통하는 순간이 너무 좋다. 누군가 내게 마음 써준 걸 발견하는 순간도. 덕분에 마음이 바빴던 이번 주에도 하루 5분을 훨씬 상회하는 시간이 내게 채워졌다.


야근하다가 ‘뭐해?’라는 선배의 메시지에 ‘일해요’라고 답했다가 서로 다른 일터이지만 만나서 즐겁게 먹었던 베이글, 늦을까 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 오랜만에 참여한 온라인 글쓰기 모임, 나를 믿고 고민을 터놓아준 친구, 내가 조금은 편해진 듯한 팀에 새로 합류한 동료, 처음으로 자신 있게 자기가 만든 책을 선물해준 동료, 새로운 공간을 만들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나 얼른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님, 내가 좋아하는 점심 산책을 자주 즐기기를 바란다고 보내주신 다정한 메일 그리고 나보다 더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소중한 마음들을 받았다.


언젠가부터 좋았던 순간을 다시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틈날 때마다 메신저, 메일, 문자, 사진…에 담긴 소중한 시간들을 복기한다. 보다 보면 자연스레 미소 지어지고 좋았던 시간이 재생된다. 이 모든 작은 행복이 쌓여 결국 나라는 사람은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미정이 말한 하루에 5분만 채우라는 의미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작고 소중한 순간들을 오래오래 기억해야지.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주 나를 채워준 순간들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 있을 거 같다. 어쩌면 그 기록 안에 담긴 모든 것이 내가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르니까.


아침에 줄넘기 하는 곳에 누군가가 남기고 간 가을 편지. 5분 충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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