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관계의 점·선·면

시간이 쌓여 숙성되면 우연이 인연이 된다

by 진심과 열심

지난 주말 짧고 알차게 도쿄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이후 외국에 나온 건 처음이었고, 늘 해외여행은 혼자 가곤 했는데, 이번엔 친한 선배와 함께했다. 여행의 마무리에 선배에게 진심으로 이야기했듯, 여행 내내 모든 순간이 좋았고 따스했기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한 사람이 누군가의 삶에 미치는 위력

선배는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나를 뽑는 데 영향을 줄 만큼, 나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다. 당시 내 이력서엔 기획한 책이라고는 달랑 외서 한 권밖에 없었고, 그저 ‘저는 어떻게 살아왔고요.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막연함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선배는 이 볼품없는 이력서를 보고 내가 ‘다정하고 성실한 사람’임을 느꼈다고 한다. 선배가 나를 꼭 만나고 싶다고 상사분께 이야기했고 그렇게 면접을 볼 수 있었고 지금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20대의 끝 무렵 그렇게 선배를 만났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뭔가 조금씩 어긋나서 컴컴한 터널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겠고, 뚫고 나갈 방법을 전혀 모르겠는. 어쩌면 영영 그곳에 갇혀 빛이 스며들 날이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선배를 만나고 내게서 조금씩 구김이 사라져갔다. 매 순간 밝게 모두를 아우르는 빛나는 태양 같은 사람 옆에 있으니, 나에게 드리워져 있던 어둠이, 묵은 때가 한 꺼풀씩 녹아내리는 거 같았다. 일도, 일상도, 마음에도 비로소 윤이 나기 시작했다. 선배를 만난 기점으로.

선배는 내가 눈물을 흘리면 함께 눈물 한 방울을 똑 떨어뜨리는 사람이었고, 내가 곤란한 일을 맡고 있으면 주말에도 그 장소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가는 사람이었다. 처음 입사한 2주 동안 그 바쁜 와중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마다 내게 30분씩 시간을 할애해 커피를 사주었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건지 일하는 내내 깊이 깨달았다.

그렇게 1년간 선배 옆에서 조잘거리며 매일 함께 웃으며 즐겁게 회사를 다녔다. 그 후 서로 다른 일터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선배는 먼저 연락하는 걸 어려워하는 나를 계속 끄집어내어 주었고 어느새 선배와 함께 먹은 밥이, 커피가, 맥주와 와인이 가득 쌓였다. 이번 여행에서 어쩌다 보니 선배와 온천까지 함께 가게 되었는데,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과장님” 하고 부르던 선배와 허물없는 친구 사이가 된 게 무엇보다 여행 내내 기쁘고 감사했다.


관계 맺기의 어려움

관계는 모든 사람이 평생 안고 가는 고민 중 하나일 텐데,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에 비해 모든 면에서 더디던 나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친구를 사귀어야만 한다는 사실’ 역시 늦게 깨달았다. 거의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내 관계 맺기의 패턴은 영악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가장 무해해 보이는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인 친구에게 다가갔고 그렇게 그 친구와 그해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을 기점으로, 다른 친구들을 점차 사귀어 갈 수 있었다. 혼자인 건 싫으니까, 왕따가 되는 건 더더욱 싫었으니까.

이후 차츰 여러 사람을 만나며, 누군가를 알아가고 친해지는 과정이 숙제가 아닌 즐거움으로 다가왔던 거 같다. 누군가와 쌓아가는 추억이, 함께 보내는 왁자지껄한 일상이 좋았다.

그런데 늘 관계에서 아쉬웠던 건 함께 있던 ‘집단’을 나오게 되면 더 관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는 거다. 예를 들면, 학교를 졸업하거나 직장을 옮기게 되면 매일 보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이였을지라도 단절되는 관계도 많았다. 당연히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기에 이전보다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지만, 문제는 내가 그걸 잘 이어오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 내게 오래 이어져 온 관계들은 거의 상대방이 주기적으로 연락해서 나를 꺼내준 관계였다. 반대로 내가 조금 더 주도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연락하는 관계는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관계도 노력인데 내가 그만큼의 힘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내 인간관계가 아쉬웠다. 이게 내 한계구나 싶었고.


마음으로 이어져 숙성되는 관계

그런데 언제부턴가 누가 더 노력을 많이 기울였는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얼굴을 봤는지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들이 조금씩 남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숙성됐다. 선배와의 관계처럼 진하고 깊게, 투명하게.

우리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특정 누군가를 우연히 어느 시점에 만난다. 그렇게 처음 만날 때 관계의 시작점이 찍히고, 그 사람과 보낸 일상에서 즐거웠던 순간, 감동받았던 순간들이 하나씩 점으로 찍히며, 그 마음과 마음이 선으로 이어지고 면으로 확장해 서로에게 넓은 면적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함께 나이를 먹고 물들어 갈 거라는 단단한 믿음이 생긴다. 더 나아가서는 영혼을 투명하게 꺼내 보여주는 관계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깊어진 관계들은 서로의 존재를 흔들 만큼 영향을 주기도 한다. 상대방의 취향, 취미에 관심이 생기고 그렇게 세계가 확장되며, 상대방에게 걸맞은 사람이 되고 싶어 노력하게 된다. 무너지고 흔들릴 때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주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쌓여 어느새 서로에 의해 변화한 모습을 마주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오전, 재택근무를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응원을 가득 받았다. 오늘부터 날이 추워진다고 감기 조심하시라는 외주 교정자분의 말, 준비하는 새 책의 부제가 뭉클해서 감동받았다고 잘 알려보겠다는 마케터분의 말, 좋은 아침이라고, 무사하고 건강한 한 주가 되시라는 작가님의 말까지. 별거 아닌 나라는 존재는 어쩌면 이렇게 사람들의 온기를 하나씩 얻어 조금씩 나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뒤돌아보니 3년, 4년, 5년… 10년이 훌쩍 넘는 관계들이, 선물 같은 사람들이 내게 가득 쌓이고 있었다. 늘 관계에 소극적이던 내가 오늘은 어떤 사람들과 어떤 시작점을 찍게 될까, 또 어떻게 선을 잇고 면적을 넓혀갈까,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 있을까를 기대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헤어짐이 더는 헤어짐이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얼굴을 자주 보진 못해도 마음으로 이어져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으로 이어진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으니까. 또 언제든 연결될 수 있으니까. 누군가 언제 다가와도 쉽게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편한 사람이 되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하루 5분을 채우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