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내향인의 깊은 깨달음
지난주 토요일 처음으로 사진 수업에서 출사를 갔다. 2시간의 시간이 주어졌고 DSLR 카메라를 들고 관광객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작가로서의 사진을 어떻게 찍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이리저리 노출값을 조정하며 사진을 찍었다.
공식적인 출사가 끝나고, 수업의 반장님께서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날이 더웠던 터라 생맥주가 간절했지만 나는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그런데 다들 나처럼 낯을 가리시는지 머뭇머뭇했고 그대로 모임이 파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 또래의 어떤 여성분이 “갑시다. 한 잔 먹고 헤어집시다!” 하고 씩씩하고 유쾌하게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래서 얼결에 우리는 다 함께 맥줏집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4시 한적한 가게 안에는 사장님 내외분만 계셨다. 인원이 20명 정도 되었기에 테이블은 4개로 나뉘었고, 어디에 앉을지 쭈뼛댔다. 그런 나를 발견하신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옆에 앉으라고 신경써주셨다. 선생님은 사진기자로서 역사의 산증인 같은 분이셨고, 내 바로 앞에는 예순 중반인 선생님보다 더 연배가 높으신 분이 앉으셨고, 그 옆에는 동안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오십 대이신 분이 앉아계셨다. 그렇게 우리 테이블 4명이 구성됐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가 남성분이었다.
화기애애한 옆 테이블과는 다른 정적인 분위기. 상황을 직감했다. 이 공간에서 말할 사람, 대화를 먼저 시작할 사람은 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계속 적막을 유지하는 건 선생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평소 나라면 머릿속에서 여러 번 검열하고 감수한 뒤 내뱉을 말을 그냥 떠오르는 대로 하기 시작했다. 질문이 생각나는 대로 선생님께 여쭤봤다. 선생님께서 답변하실 때면 “와 그러셨구나. 처음 알았어요. 그런 거였군요!”라고 말하며 열심히 리액션했고 이와 동시에 또 무슨 질문을 드려야 할지 머릿속 회로를 굴렸다. 수업 시간에 좋았던 포인트들도 계속 나열하며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께만 질문을 드리면 내 앞의 두 분이 소외감을 느끼실 거 같아서, 두 분께도 질문을 드렸다. “오늘 무엇을 찍으셨어요?” 하고. 그분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눈은 동그랗게 뜨고, 하시는 말씀마다 끄덕이며 리액션을 했다. 최근에 이렇게 눈을 반짝이며 온 힘을 기울여 누군가의 말을 들었던 경험이 있었나?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내가 낯설었다.
선생님께서 잠깐 자리를 비우셨을 때도 두 분이 어색해하실까 봐 “무엇을 찍고 싶으셔서 이 수업에 들어오셨나요?”라고 교과서적인 질문을 건넸다. 심지어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셨던 질문이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버퍼링 걸린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질문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이 뻔한 질문에 감사히도 두 분은 찬찬히 대답을 잘해주셨다. 한 분은 사찰 사진을 잘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고, 한 분은 언제 그 장소에 또 갈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행지 풍경을 잘 담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이렇게 질문을 드리는데 처음으로 유재석 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어떻게 대답할지, 대화가 끊기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해하며, 최대한 잘(재미있게) 듣고 있다는 리액션을 하며, 다음 질문도 장착하고 있어야 하니까.
이렇게 진땀을 빼는데 한 편으로는 이 상황이 조금은 웃겼다. 지난번 글을 쓰며 ‘일상을 매 순간 시간 여행자처럼 살아가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그 생각이 퍼뜩 스쳤다. ‘만약 지금 내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니 이 상황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낼지 주도권은 나에게 있으니, 온전하게 이 상황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니 조급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밝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50대 남성분도 나와 함께 선생님께 몇몇 질문을 건네셨는데,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저 친구 되게 노력하는구나’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처음 말을 섞어본 분과 동지애를 느꼈다.
바쁜 사람들이 하나둘 먼저 나가고, 내 옆에는 아까 이 맥줏집으로 우리를 인도한 여성분이 앉게 되셨다. 여전히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계셨고, 맥주에 조금 기분이 고조된 나는 그분께 궁금하던 질문을 툭 내뱉었다.
“E(외향인)이시죠?” 하고. 그랬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니에요. 저 I(내향인)예요.” “저 지금 되게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어색해질까 봐, 매도 먼저 맞는 심정으로 미리 말을 꺼내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해주셨다.
수업 시간에도 늘 쾌활하셨고 출사지로 선생님과 함께 걸어오면서도 쫑알쫑알 즐겁게 말하셨기에 나는 당연히 외향인인 줄 알았다. 나와는 기질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노력하는 거였구나. 이분도, 나도 오늘 되게 노력했구나’ 하고 느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론 ‘대화’에 대한 고민을 크게 한 적이 별로 없다. 일대일 대화를 선호하기에 주로 그런 만남을 이어왔고, 일할 때는 일이라는 명확한 소재가 있으니 말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최근에는 정말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만 약속을 잡았던 거 같다. 낯선 환경에 나를 놓아둔 기억이 거의 없다.
그동안 내가 너무 좋은 사람들, 친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시도하고, 누군가와 친해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 팀 회식 시간에, 새로 합류한 동료가 생각났다.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는데, 우리가 말이 없으니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걸 회식이 끝나고 듣게 되었다.
'더이상 동료에게 짐을 지워주지 말자. 나도 말을 보태자. 함께 즐거운 대화를 나누려 노력하며 그렇게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자’라고 깊이 다짐하고 깨달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