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판인의 바람
10월 10일이었던 지난주 목요일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 고요한 분위기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오”, “우와” 같은 탄식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다들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 있나 보다 하고 교정지를 보고 있었는데 옆 팀의 팀장님께서 메신저로 “한강 작가님 노벨문학상 방금 수상했어요! 로그인해 있는 사람에게 소식 전하기ㅋㅋㅋ”라고 연락해 오셨다. 내 눈을 의심했다. 놀랐다. 노벨문학상은 신기루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살아생전에 한국 작가님께서 수상하는 걸 보는구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퇴근길에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대학생 때 한국어 도우미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일본 할머니께서 연락을 주신 거였다. “한강 작가님의 수상을 축하해요. 하시는 일도 바빠지겠네요. 재미있게 건강에 유의하며 일해주세요”라고 보내주셨다. 생각지 못했던 연락이었고, 뉴스를 보자마자 나를 떠올려주셨다니 감사했다.
뉴스에서는 내가 아는 인쇄소 기장님들의 인터뷰가 나왔다. 한껏 신나신 얼굴로 “간만에 정신 없습니다. 주말에 일해도 기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회사에는 한강 작가님의 책은 없지만, 다들 덩달아 활기찬 분위기여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주말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니 한강 작가님의 수상 소식을 축하하는 진열물들이 가득했고, 한강 작가님의 책은 모두 일시 품절 상태라, 정문 입구 매대에는 아버지인 한승원 소설가님의 책이 놓여 있었다. 이 의견을 낸 직원분의 아이디어가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전례 없는 상황이다.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지 하루 만에 3개 서점에선 30만 부가 판매되었고, 일주일도 안 되었지만 곧 100만 부를 넘길 거라고 한다. “한강 작가님의 책을 시작으로 한국 문학을 경험해보겠다”라고 하는 시민들의 인터뷰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 이 업계에서 일한 지 10년쯤이 돼간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불황인 업계다, 점점 더 상황이 안 좋아진다”라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고, 나 역시 크게 체감하고 있다. 정말로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
한 권의 책을 기획해서 출간하기까지(책마다 다르지만) 보통 1년의 시간이 거뜬히 걸린다. 책의 결과가 미비할 때면 작가님들께서 수많은 시간 동안 애쓰셨다는 걸 잘 알기에 죄송한 마음이 크고, 나 역시 한 글자씩 종종거리며 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했기에 헛헛할 때도 많다.
오늘 KBS 뉴스엔 이런 기사가 나왔다.
‘노벨문학상 나왔지만…“성인 60% 독서 안 해” 역대 최악’
나 또한 가히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번 일을 계기로 책을 향한 관심이 더 높아지기를 마음 깊이 바란다. 모든 국민이 한 달에 한 권은 아니더라도, 일 년에 세 권은 읽었으면 좋겠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며, 회사에서 내내 책 얘기만 하는 나도 영화 보는 것도,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쇼츠 영상도 재밌게 본다. 그래서 ‘책이 제일 좋아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책은 책만의 역할이 있다’라고는 말할 수 있다.
위의 기사에서는 독서의 장점에 대해 ‘어휘력 향상, 불면증 해소, 정신건강’에 좋다고 소개했다. 물론 맞지만, 더 이야기할 수 있다. 업자를 떠나 독자로서 내가 느끼고 있는 책의 효용은 이렇다.
1. 경험의 폭을 넓혀준다.
: 소설까지도 모든 책은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쓰였다. 우리는 평생 자신의 삶밖에는 살지 못하는데 책은 타인의 삶을 오롯이 진득하게 경험하게 해준다. 덕분에 다른 직업을, 다른 성별의 삶을 무궁무진하게 체험할 수 있다. 가장 적은 돈으로 인생을 폭넓게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방법이다.
2. 지금의 고민을 해결해준다.
: 누구나 고민을 안고 있다. 특히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이라면 더 큰 무게로 일상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다행인 건 그 고민에 해답을 주는 책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거다. 서점 혹은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만날 때 가장 끌리는 책이 바로 그 책이다.
3. 삶의 중심을 잡아준다.
: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 책은 굳건히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 휘청거릴 때면 몸에 체화된 수많은 지혜의 문장들이 중심을 잡아준다고 느낀다.
4. 표현력, 어휘력, 사용하는 단어 수준이 달라진다.
: 확실히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 평평한 단어가 아니라 뾰족하고 적확한 단어를 쓴다. 몸이 그 사람의 생활 습관을 대변하듯,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읽기 습관을 보여준다.
5. 미감이 높아진다.
책은 표지부터 면지 색상, 서체, 일러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가 함께 담긴 종합 예술이다. 특히 표지 이미지에는 지금 인기 있는 작가의 그림이나 사진이 자주 쓰이기에 신간 책만 보아도 당대의 디자인 흐름을 알 수 있다.
6. 기획력과 구성력이 좋아진다.
모두가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다. 차례는 책 내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지도와 같다. 때문에 차례의 기승전결이 완벽할수록 정성을 많이 들인 좋은 책일 확률이 높다. 책을 많이 읽으면 기획과 구성 능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7.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준다.
책은 나의 생각, 태도, 가치관,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금껏 읽은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라고 말하면 비약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이다. 가끔 책장에 꽂힌 책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내 책장엔 지금껏 내가 해온 고민이, 꿈꾸는 욕망이 모두 담겨 있으니까. 내가 소유한 책은 지금의 나를 고스란히 비추고 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를 때마다 이 목록은 계속 추가하려고 한다.
근사해 보이는 책, 어려운 책은 잠시 내려놓고, 지금 자신에게 가장 끌리는 책을 집어 찬찬히 읽어보자. 그렇게 모두가 읽는 재미를 한번 맛보고 나면, 내년쯤에는 이런 기사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한국, 노벨문학상 계기로 독서 선진국 등극! 한국인의 저력에 전 세계 또다시 깜짝 놀라”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벨문학상이라는 기적도 이뤄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