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의 고집에 대하여
최근에 나를 호구로 여기는 존재가 있다. 본인이 시키는 거라면 내가 다 할 거라고 예상한다. 그런데 정답이다. 나는 네가 원하는 거라면 기꺼이 뭐든 해줄 용의가 있다.
나를 호구로 삼는 자, 누구인가?
아침 산책을 다녀와서 밥을 다 먹고는 이제 내가 조금 여유로워진 걸 파악한 순간 ‘히이잉’ 한다. 히이잉, 히이잉 울면서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와 같은 세상 가여운 표정으로 다시 나가자고 한다. 예전엔 실외배변이 급할 때면 이렇게 나에게 요청하곤 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나만 보면 기지개를 켜고 천천히 일어나 히이잉 한다. ‘저기 호구 언니 있으니까, 이제 나가볼까?’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내가 못 본 척하면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계속 운다. 20분을 넘길 때도 있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됐다. 네가 고집 대마왕이라는 것을, 모두가 고집불통인 우리 가족 중에서도 네가 최고라는 것을. 그렇게 너는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야 만다.
히이잉 외에도 강아지의 고집이 발현되는 순간은 자주 있다. 산책하다가 가기 싫은 곳이 보이면 멈춘다. 아무리 산책 줄을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미 몸을 낮추고 다리에 잔뜩 힘을 실은 상태다. 마치 돌조각상이 된 듯 딱 버틴다. 그러면 나는 경로를 수정할 수밖에 없다.
산책하다가 무언가를 주워 먹었을 때면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세차게 도리도리한다. 내가 절대 방해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준다.
아이들에게 하루에 두 번 개껌을 주는데, 그 숫자를 채우지 않은 날은 떼인 돈을 받아내려는 사람처럼, ‘맑은 눈의 광인’처럼 반짝반짝한 눈으로 계속 나를 올려다본다.
‘저기, 뭐 잊은 거 없어?’ 하고.
뭔가를 더 먹고 싶거나 장난을 걸고 싶을 때면, 앞발로 내 몸을 툭툭 친다. 그러면 나는 피식 또 웃음이 터진다.
연말에 올해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면 바로 떠오를 순간이 있다. 여름날 오후 2시, 히이잉 하는 소라를 데리고 나와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을 가득 받으며 걸었다. 너무 더웠던 소라는 중간에 그늘을 찾아 앉았다. 그러곤 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으니 빨리 집에 가서 쉬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나는 소라를 일으켜 세우고 뛰기 시작했다. 1초라도 빠르게 소라를 집에 데려다줘야지 하고 쉬지 않고 뛰었는데, 갑자기 내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소라였다!
소라는 내 앞길을 막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이 인간아, 적당히 뛰어’ 하고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내가 쉬지 않고 뛰니 힘들었나 보다. 그렇게 함께 걸으며 집에 돌아오는데, 소라가 나를 가로막은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뛰는 걸 엄청 좋아했기에 질주하는 소라에게 “그만 뛰어, 언니 더는 못 간다” 하고 내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곤 했는데 이젠 그 반대가 된 거다. 물론 더위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이날만큼은 내가 소라를 이겼다고 유치한 생각을 했다. 매일 줄넘기하며 체력을 기른 보람이 있었다. 사람인 내가 진돗개인 너를 이겼다! 멈추고 싶을 때 너는 누군가를 가로막을 수도 있구나, 너의 언어를 하나 더 알게 된 날이었다.
우리에게 소라와의 인연을 만들어준 옆집 아저씨는 이제 근처에서 운영하던 사업체를 다 정리하고 제주도에 완전히 정착하신다고 했다. 아저씨가 거의 마지막으로 소라를 보기 위해 오셨다. 마침 엄마와 산책을 나가고 없던 소라는 아저씨의 차 냄새를 킁킁 맡더니 곧바로 달려왔다. 그러곤 온갖 환대로 아저씨를 맞아주었다. 아저씨는 소라를 쓰다듬으시며 눈에 가득 소라의 모습을 담아 가셨다.
이렇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너, 이토록 사랑스런 너란 존재, 언니랑 오래 행복하자. 너의 고집이라면 언니가 언제든 받아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