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강사가 되기까지 1
32살에는 요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 고 인스타그램에 썼다. 그때가 31살이었다. 요가 강사 생활을 시작한 건 34살이다. 그때 썼던 게시글을 보고서 요가 선생님이라는 갈래 길이 어쩌다 내 삶에 나타나게 된 건지 다시 기억해 냈다. 나는 이렇게 썼다.
작년에 귀벌레라는 단편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했고, 가기 싫었던 쫑파티에도 어른답게 참여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던 나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 너무 궁금했다. 아니, 다들 언제 그렇게 자기 계발을 했기에 이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왜 나는 나이 삼십이 다되어 가도록 아무것도 쥐고 있는 게 없는가, 하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으로 이름도 물어보지 않은 옆에 앉아 있던 스탭에게 어떻게 먹고살고 있냐고, 앞으로는 어떻게 먹고 살 계획이냐고 물어봤다. 여전히 이름을 모르는 그 스태프 분은 이러저러한 이야기 끝에 요가 선생님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요가 선생님을 '나도 할 수 있는 것' 목록에 넣어놨는지도 모른다.
그래 분명히 그런 일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분은, 결국 요가 강사가 되셨을까? 그때 자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의미 없이 던진 질문에 대답한 그 대답이 그 사람의 직업이 됐다는 걸 알고 계실까?
그 답변을 들었을 때는 요가라는 것이 그저 레깅스 입고 스트레칭 하며 유연성을 뽐내는 것이거나, 침이 빼곡히 꽂힌 방석 위에 앉아 오랜 시간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의 대화가 지금의 삶을 결정하는 데 일말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한 발자국이 갈래길을 만드는 초석이 됐던 것이다.
19년도에 모 회사에 입사했다. 첫 출근하던 그 순간에는 어렵게 얻어낸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를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 다짐을 기념하는 트레킹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무색하게 근무를 시작하고 다섯 달만에 "32살에는 요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라고 써버렸다.
고작 다섯 달 만에 나는 무엇에 질렸던 걸까? 아니면 내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요가가 내 삶을 구원해 줄 것 같은 충격을 준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힘들었다.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이면 축구깨나 했겠다는 말을 하게 만드는 나의 까만 피부. 깜씨, 아프리카 씨까씨까, 블랙죠, 깜도 등등 까만 것과 관련된 별명은 끊이지 않았다. 윤미래 씨가 표백제로 얼굴을 씻었던 그 마음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니까. 거울 앞에 서서 나보다 못생긴 사람을 찾아내려고 반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손꼽아 새보기도 했다. 아무도 없었고.
일찍 찾아온 2차 성징도 어릴 때 나를 힘들게 했다. 음악 시간에 다 같이 노래를 부를 때면, 반 아이들이 모두 아무렇지 않게 부르는 노래가, 일찍 변성기가 시작된 내게는 너무 어려웠다. 노래가 시작할 때 조금 부르다가 입만 뻥끗하고, 그러다가 선생님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단상 앞에 나가 혼자서 그 노래를 불러야 했다. 올라가지도 않는 음을 쥐어짜 내며.
우리 집의 가난도 부끄러웠다. 급식비가 밀려 선생님께 불려 가는 것도 부끄러웠고, 동물의 털이 가득한 두터운 겨울 점퍼가 부러웠다. 같은 옷을 매일 입는다는 이유로 반 아이들이 모두 있는 곳에서 선생에게 혼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친구들 집이 모두 얇고 평평한 텔레비전일 때 우리 집은 Gold Star의 브라운관 텔레비전이었고, 친구들 집이 스탠드 에어컨일 때 우리 집은 망한 모텔에서 가져온 Gold Star의 에어컨이었다.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할 때면 로딩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우리 집 똥컴이 친구들의 인내심을 요구했고, 오래된 냉장고는 엄마의 코골이보다 크게 울어 나를 잠 못 들게 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야 나는 엄마 아빠가 한 집에 사는 것이 대다수의 가정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친구들 아빠는 집에서 잔다는 것을 혼자 눈치채고서 혼자 놀라고 혼자 이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안84가 자신처럼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래서 내 행동을 사람들이 그렇게 의아하게 여길 줄 몰랐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우리 가족의 형태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그 모습이 타인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살기 위한 내 출구전략은 뻔뻔함과 당당함이었다. 검댕을 묻힌다며 얼굴을 들이밀면 다들 질색하며 웃었다. 노래를 부르는 대신 고래고래 괴성을 내면 또 웃었고 급식비를 왜 못 냈냐는 친구의 질문에 당당하게 “돈이 없어서”라고 말하면 친구는 그게 농담인 줄 알고 웃었다. 나의 다름은 나를 웃긴 사람으로 만들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과장과 반복이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은 또한 나를 세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구김 없이 자란 아이들은 모르는 구겨진 순간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나는 그 능력으로 다정한 사람처럼 굴 수도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누군가의 기분을 잘 파악하게 됐고, 듣고 싶은 말과 받고 싶은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눈치가 빠른 사람이 되었다. 근데 이제 내 마음의 눈치는 볼 줄 모르고, 쓸데없는 농담으로 빈 곳을 때우기나 하는.
한편, 남들과 구별되고도 싶었다. 남자들이 싫어하는 색깔을 일부러 좋아했고(핑크색 안경을 쓰고 다녔다), 남들은 보지 않는 영화를 보았고(영화과에 진학해서도 같은 취향을 발견한 적 없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었고, 웃음을 위해 망가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케이블 티비 방송에 출연했고, 그 때문에 온 동네 노래방에 내 얼굴이 나와서 형들에게 꽤 맞았고 덕분에 잊힐 권리가 필요하다는 걸 20년 전에 이미 절실히 깨닫기도 했다.
남들과 달라서 스트레스받고 동시에 남들과 구별되고 싶은 이 모순된 마음에서 내 삶의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남들 절반만 따라갔으면,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며 살 줄 알았으면, 여기에 이런 글을 쓰고 앉아 있을 인생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한때 평범히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했던 것은 실은 부러워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
요가강사가 되고 싶었던 것도 남자 요가 강사가 세상에 많지 않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살면서 꽤 많은 운동을 짧고 다양히 접했다. 초등학생 땐 태권도를 중학생 땐 복싱과 유도를 고등학생 땐 달리기를 대학생 땐 클라이밍과 크로스핏, 수영을 했다. 그 운동들을 하면서 한번도 강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왜 하필 요가에서는 강사가 하고 싶었을까.
왜 요가 강사가 되고 싶냐는, 되었냐는 물음에 스스로 납득 가는 대답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럴싸한 말을 많이 했지만, 예를 들면 브런치에도 썼듯이 발전하는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 혹은 (명상을 어렸을 때도 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요가에서 추구하는 영성이 나와 잘 맞는 것 같았다는 믿음 등등, 결국, 그래서, 뭐, 어쩌라고까지 들먹이며 끝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서 발견되는 진짜 정답은 구하지 못했다. 눈에도 잘 보이고 심지어 축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해무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가를 했다. 왜 하는지, 왜 즐거운지, 왜 강사까지 굳이 하고 싶어진 건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방구석에서 시작한 요가가 어느 정도 몸에 익었고, 외계어 같았던 자세 이름들이 귀에 익었고, 적어도 제일 못하는 사람 만큼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프라인 요가원에 도전하고픈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