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의 이유 / 더 빈틈없이 설레자는 욕심
1. J도 계획은 어려워
"요즘은 여행을 계획하기가 더 힘든 것 같아. 응? 내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요즘은 가게 운영시간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경우가 많더라고. 게다가 자기만의 플랫폼(인스타그램, 블로그)에 언제 가게 문을 여는지, 언제 휴무인지, 어떤 메뉴가 품절인지에 대한 정보를 올리다 보니 하나씩 꼼꼼하게 확인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진 거야. 미리 계획하는 의미 없게 갑자기 당일 휴무를 공지하는 가게도 있어. 그럴 때면 계획의 의미가 참 무색해지지. 그런데 왜 계획을 하냐고? 그건 내가 막연히 믿고 있는 신앙 같은 마음 때문이야 그건…”
2. 그럼에도 계획을 한다
① 계획은 고되다. 무엇보다도 날짜를 잡는 일이 가장 큰 난관이다. 점점 각자의 일들로 바빠지다 보니 다 같이 여행할 수 있는 날을 정하는 데 운은 필수조건이다. 게다가 현생을 유지하기도 피곤한데 먼저 나서서 계획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올여름은 단톡방에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이 즐비했다. 하지만 마음먹고 여행을 실행시키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갑갑해하다 숙소 몇 개를 추려 단톡방에 턱 올려본다. "갈 거야?" 물길을 틀었다. 그때부터 계획은 물살을 타고 속도를 낸다.
'뭘 먹을까...' 지도 앱에 맛집을 검색한다. 리뷰를 확인하고, 동선, 영업일, 가격, 예상 인파, 예약 가능 여부 등 섬세한 작업으로 일정을 선정한다. 이 과정에서 P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것이 내 방식이다(모든 P가 계획하기를 번거로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여행 메이트들은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저 그곳에 가는 걸 좋아하는지 아닌지 작은 관심을 보여주고(보통은 다 좋다고 한다) 정산만 제때 해주면 된다.
정보를 뽑아내고 의견을 종합하는 일은 회사든 어디든 고되고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일궈진 엑셀 표를 보는 순간 짜릿해진다. '제주 여행_최종.xls' 파일은 동행자들에게 미리 공유되는 게 중요하다. 상상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은 여행의 설렘을 극대화한다. 함께 설레며 여행 당일을 맘껏 기대하는 과정은 여행에서 내가 아끼는 순간 중 하나다.
② 낯선 지역을 방문한다는 불안감도 나를 계획하게 한다(겁이 많다). 처음 해외여행을 계획했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가장 먼저 서점에 들린다. 가장 평이 좋다는 여행 출판사의 가이드북을 구매해 정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정보를 기준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최신 정보를 체크하고, 추가 정보를 수집해 더 나은 관광지와 맛집을 확인하고 예약한다. 무엇보다 안전이 보장되는 곳이어야 한다. 귀중품 도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 메는 가방을 구입해 도맡아 관리하기도 했다. 가끔 이 이야기를 하면 혀를 내두르는 사람도 있다.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보통 이 정도로 계획하면 여행은 성공적이다. 당시 동행자들은 이 해외여행을 전설로 기억한다(자랑).
③ 마지막으로, 계획에 정성을 들이면 우리의 여행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릴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길을 잃어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더라도 그곳은 우리가 가려던 곳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일 거라는 믿음. 나는 여행뿐 아니라 평소에도 정성을 들인 것에는 어떤 힘이 생긴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더 좋은 순간들로 이끈다고 믿는다.
3. 계획을 한다는 건 우리의 여행이 빈틈없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내가 여행을 계획하는 이유는 우리의 여행이 더 기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원래도 여행은 가기 전이 더 설레는 법인데 더 빈틈없이 설레자는 욕심이다. 열심히 계획해도 잘 따라주지 않는 게 계획이라지만 나는 그런 정성이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가게 해준다고 믿는다.
고된 계획 작업으로 얻게 되는 가장 큰 보상은 동행자의 반응이다. ‘너무 좋다’는 리액션에 제대로 조련된다. 그러면 다음에 또 계획을 짜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부디 J형 인간들에게 너그러운 리액션을 보여주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 22.07. 제주 여행 중
* 사진과 글 / 덕덕(Insta@kiki_k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