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살며 쓰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제이 Apr 22. 2021

[일간 이슬아]를 읽고  

[일간 이슬아]라니.


내 이름 석자 앞에 [일간]이라는 단어를 잠깐 붙여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답답해오고 마른 손바닥을 여러번 부비게 만든다. 굉장한 압박을 주는 단어임이 틀림없다.  


한국에 살지도 않는데다가,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고, 매우 폐쇄적인 소셜미디어라이프를 살아가는 나에게, 이슬아작가는 정말이지 우연히 알게된 유명인이었다. 처음엔 사진을 먼저 보게 되었는데, 짧은 컷트머리와 크지는 않지만 피할수 없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그녀의 글을 읽어보니 외모와 비슷한, 그러니까 간결면서도 강렬한, 글을 지어내는 사람이었고, 글에 담긴 그녀의 생각과 시선은 더더더 매력적인 젊은이었다. 다른 사람을 두고 "젊은이"라는 단어를 쓰는건 나에겐 낯선 일이다. 그녀를 나와 다른 "젊은이"라고 쓰는 이유는, 아마도 그녀에 비해 "젊은이"가 아닌 내가 그녀를 꽤 부러워하기 때문인것 같다.


이슬아 작가의 문장은 착하다. 문장은 정확히 주어와 형용사와 목적어와 부사와 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비교적. 여러문장을 이어서 한문장으로 만들지도 형용사와 부사를 여러개 줄줄이 나열하며 하고 싶은 말을 이런 저런 방법으로 강조하지도 않는다.


주변사람들과의 대화가 평서문속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글의 시점은 이슬아의 눈이며 이슬아의 입이고 그녀의 손가락이라 한번도 막히지 않고 매끄럽게 눈을 따라 읽힌다.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은 적은 없지만, 입으로 소리를 내어 읽는다 해도 아이들 그림책처럼 머릿속에 어려움없이 와 닿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녀의 손끝에서 선택된 유난할 것 없는 담백한 부사들은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자리잡고 있어서, 부담스럽지도 똑 허전하지도 않다. 때로는 문장이 좀 덜 채워졌다는 느낌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그런 느낌은 언제나 과한것 보다 열배는 나았다.


이슬아 작가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무거운 이야기를 깃털마냥 가볍게, 그저 스치고 지나갈 가벼운 이야기를 심장 바로 윗켠에 돌맹이를 하나 얹은 듯 묵직하게, 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를 촘촘히 맛있게 써내려간다. 그녀에겐 심각한 일은 심드렁하고, 시시한 일은 언제나 근사해진다. 여기서 끝인가 싶을때 한 두 단어를 덧붙여 쿵 하고 반전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끝나길 바라지 않을때 아스라히 글은 맺어진다.


그날 그날의 날짜로 맺어진 글의 마지막 마침표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다음장으로 눈을 돌리지 못할때가 많았다. 매일매일 배달되는 글이었다니, 내가 그 글들을 매일 아침에 읽었다면 아마 하루종일 그 마지막 마침표에서 서성되었을 것이다.


자전적 수필은 언제나 내겐 매력적이다. 작가의 인생을 이리 저리 둘러보는 기분도 들고, 그중에서 각색하지 않은 “진짜”와 진짜에 기대어 만들어진 진짜인 “가짜”를 함께 찾아보게 만든다. 진짜를 적어내려가다가도 그래도 되나 싶어서 멈칫하고, 진짜를 살짝 틀어 바꾸어 보려다가도 이건 아닌가 싶어서 마른침만 삼키는 내가 바라보는 이슬아 작가는, 솔직하고 또 용감한 글쟁이이다. 나이탓을 대며 슬며시 꽁무니를 빼었지만, 솔직함과 용감함은 그녀가 나보다 “젊은이”이기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해서, 나이와 상관없이 그녀의 글이 더 좋은지도 모르겠다.


작가와 독자사이의 여러 단계의 절차와 플랫폼을 생략한 산문직거래를 시도하여, 2,500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학자금대출을 갚을 계획을 세운 기발한 젊은이라고, 글의 완결성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마감에 맞춰 수필을 써본적은 없으나,  외의 다양한 글들을 마감해   경험으로 미루어본다면, 2000자의 수필을 매일매일 쓰고 고치고 발송해야 한다는 별것도 아닌 일이 아니다. 커서만 깜빡거리는 새하얀 빈문서에 점을 찍었다 지웠다를 수백 수천번 계속해야 몇줄의 문장이 완성되는지 조금은 상상해볼수 있어서, 작가의 고된 시간들이 가슴에 뻐근하게 전해져온다. 이것이, 곧고 강렬한 그녀의 눈빛이 순한 초승달로 변하면서 “늦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미안해하고 있을  젊은이에게 더욱 마음이 가는 이유이다. 대담한 젊은이 같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부끄러워하고 창피함도 많은 글을 세상에 내어 놓는, 모든 다른 젊은이같은 젊은이이기도 하다.


862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두꺼운”이라는 형용사를 쓰려다가 이내 거짓말임을 깨닫고 지웠다. 난 전자책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열권 미만의 전자책 중의 하나인데, 그 중에 가장 긴 책이기도 했다. 서너페이지의 수필들이 모여있는 책이라 읽다가 던져두고 다시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인지, 플롯이 연결된 소설이 아니라 한참만에 들여다봐도 다시 몇페이지 읽어나가기에 문제가 없어서인지, 꽤 오랫동안 조금씩 읽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이유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씩 하나씩 아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컸던것 같다. 매일매일 하나씩 발송된 글이라고 생각하니, 한숨에 여러꼭지를 연달아 속도를 내며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녀가 하루하루 담배연기와 커피와 달리기로 만들었을 글의 처음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을 찬찬히 눈으로 따라 읽어가는 즐거움이 나에겐 꽤 컸다.


내가 이슬아 작가의 나이쯤에 글을 썼다면 어땟을까. 무심한것 같으면서도 용기있고, 느슨한것 같으면서도 강렬하게 세상에 내 목소리를 낼수 있었을까. 그녀처럼 솔직한 글을 담담히 써내려갈수 있었을까.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내가 그녀 나이쯤이었을때의 기억을 꽤 오랫동안 찾아 헤맸다.



-------

커버사진은 [일간이슬아] 표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절과 무례의 작은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