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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Mar 26. 2024

어른과 어린이 사이


열두살이 된지 채 두달이 되지 않은 딸은 때로는 전격적으로 틴에이저 흉내를 내고 싶다가도, 또 때로는 나이의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처럼 어린척을 하고 싶어하여 헷갈리게 한다. 


가끔은 이미에 까만 마커로 "I'M A TEENAGER. WHAT DO YOU EXPECT FROM ME?"라고 대문짝만하게 써둔것 처럼 온갖 불량한 인상을 쓴 채로 집을 돌아다니는데(이때는 사실, 이마에 몇 개 돋은 여드름을 보고 쌤통이라고 생각한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이때는 나머지 가족들은 최대한 틴에이저 상전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각자 안전한 장소로 대피하여 자기 방어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둘 셋 모여서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절대 안된다. 수군거리는 내용이 본인과 관계가 있든 없든가에 이건 불난데 부채질을 하는 가장 조심해야 할 행동 중 하나이다. 


그런가 하면 순한 양의 탈을 쓰고, 혀 짧은 소리를 하면서, 유치원도 안갈 나이의 어린이처럼 이거 챙겨달라 저거 챙겨달라 하며 주변 사람들을 매우 귀찮게 하는데, 그래도 인상쓴 틴에이저보다는 양의 탈을 쓴 틴에이저 비위를 맞추기가 그나마 낫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요구 사항을 들어주려는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다. 



갱년기 모친과 사춘기 자녀가 제대로 붙으면 갱년기가 가볍게 "승"한다는 전해내려오는 미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붙어서 이긴다 한들 별로 얻는 소득이 없다. 집안 분위기만 서늘하고, 의외로 뒤끝이 너무 없는(뒤끝이 너무 없는것도 주변 사람 참 힘들게 할수 있는 성향이어서) 딸 덕분에 내 속만 오랜기간 푹푹 썩는터라, 웬만하면 면전에서 제대로 붙는것은 삼가하고, 조금 비굴하게 돌아서면서 들릴랑 말랑 중얼거리는 전략을 구사하긴 하는데 나의 전쟁 상대는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여튼, sweet and mean 모드를 변화무쌍하게 탈착하며 실은 사람이 되어가려고(지금까지는 사람이 아니었던게 맞다) 용을 쓰려니, 본인도 사는게 그리 녹록치는 않은것 같다. 


밥먹는 양이나 몸집 뿐만 아니라, 성격과 주관(이라고 쓰고 고집이라고 읽는다), 취향의 호불호가 생겨나고 있으니, 이젠 이 집에 어른 둘 + 아이 둘이 아니라 어른 둘 + 애어른 하나 + 아이 하나가 함께 살고 있다고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 왔구나 싶다. 독립적인 인격체인 세 어른이 한 집에서 살려면 모두 다 어렵고 또 모두 다 애써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십여년 전 두 독립적 인격체가 가족을 시작했을때 .. 얼마나 부대꼈는지 생생히 기억나기에), 조금씩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 딸애가 기특하기도 하고 애쓰는 모습에 맘이 (잠시동안만) 짠하기도 하고 그렇다. 


아이들 병원 기록이 내 온라인 계정아래 있어서, 내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여 정기검진이든, 병원 예약이든, 백신 주사 예약 이든 모두 확인 및 관리가 된다. 남편은 어른 사람이므로 본인 계정으로 따로 관리하는데, 내 계정은 늘 세 여자의 다양한 검진, 예약, 검사, 접종 등으로 알록달록 하다. 딸아이 열 두살 첵업을 하려고 로그인을 했는데,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아이의 이름이 있어야 할 박스에 막둥이 이름만 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전산 오류인가 싶어서 문의했더니, 주 정부 법상 열두살 부터는 본인의 의료기록을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공유할 의무가 없어서 자동적으로 내 계정에서 분리된거라고. 그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도, 막상 내 새끼가 이제 병원 기록에 있어서는 내 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된 거라고 생각하니 잠시 멍 해졌다. 얼마전 중얼 거렸던 독립적 인격체는 온데간데 없고 난 갑자기 울상이 되었다. 몇년 더 아이의 의료기록 관리자로 신청 및 허가를 받으면 되는 간단한 절차를 밟으면 되었지만(그 허가도 딸애가 내용을 리뷰하고 동의를 해야 했음, 이제 엄마를 허가하는 입장이 되다니), 이 날 온종이 기분이 많이 이상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아니 열두살은 너무 어리지 않나" 하며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들 학교와 스포츠팀에서 보내는 각종 스케줄과 정보들은 늘 내 이메일로 오는데, 그 이메일을 읽고 스케줄을 체크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나중에 처리하려고 잠시 미뤄놨다가는 수영팀 연습 장소가 바뀐것을 모르고, 다른 수영장에 데려다준적이 있질 않나, 연습 시간이 바뀐것을 미처 확인 안해서 연습을 못한적이 있질 않나. 애가 많은 것도 아니고 시키는 것이 많은 것도 아닌데도, 늘 나는 허둥지둥 정신없었다. 딸애가 어느날, 자기 액티비티나 학교 관련한 이메일은 자기에게 포워드해달라고 요청했다. 자기가 보고 스케줄 확인하고 필요한 것도 미리 챙기겠다고. 실제로 다음주부터 시작하는 수영팀 새 반에서 필요한 paddle은 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음주에 사용하려면 어서 주문해야 한다고 아마존 쇼핑카트에 넣어두고 결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이메일 주소를 추가할 수 있는 계정에는 딸애 이메일을 추가해두었고, 그렇지 않은 계정은 이메일을 받으면 읽기도 전에 딸애에게 포워드해서, 나중에 브리핑을 받는 체제로 개편되었다. 음, 자기 스케줄과 준비물은 자기가 챙기니까 나는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부담감에서 벗어나 편해졌는데, 남편과 나는 "점점 독립적으로 되어가는건 좋은건데 기분이 왜 이렇게 이상하지?"라는 비밀대화를 나누었다. 




아이의 성장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너무 어른처럼 대접하면 서운해하는것 같지만 한편 으쓱해하는것 같고, 아이를 너무 애처럼 대하면 짜증내지만 한편 안심하는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로 나를 불러 잠을 깨워달라는 둥, 오늘 입을 옷을 같이 골라달라는 둥 세상 귀염귀염한 어린이가 되셨다가(절대로 내가 골라준 옷을 입지도 않을거면서), 때로는 방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방문에 대문짝만하게 "노크 세번해도 답이 없으면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니까 돌아가시오.."와 같은 시건방진 싸인을 걸어두는 분. 


자식을 잠시 함께 지내다 떠날 손님으로 생각하라고 했던 어떤 심리학자의 말을 늘 명심해왔다. 손님으로 여기면 고압적으로 명령을 하지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고 화가 나지도, 진상짓을 한다고 화가나지도 않을거라고 했던가(이렇게 품위없는 문장은 아니었던것 같으나 내 속으로 들어오며 이렇게 번역되었다). 아이와 사이가 좋아 죽겠다가, 서로 화가 나다가, 짜증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는 얼마간의 우리집에서 묵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진짜 어른이 되어서 내 집에서 떠나겠거니 생각하면, 방금 목격한 옷이 방바닥에 아무렇게 나뒹구는 딸애의 방도 민박집 주인처럼 간소한 청소만 해준 채 예의바르게 문을 닫아주고 나올 수 있을것 같다. 그 순간이 오면, 정말 쿨하게 그 동안 우리와 좋은 시간 보내줘서 고마웠다고 이야기하고, 아이는 그 동안 잘 묵어 간다고 인사를 하고, 그렇게 어른대 어른으로 보내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가끔 하는데, 정말 말이 안되는것 같다. 아무래도 대학 보낼때 가방 들고 기숙사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에 대성통곡을 하며 신파극을 찍을 가능성이 약 200%는 더 말이 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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