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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제이 Sep 06. 2015

긴급 연락처

내 긴급 연락처를 찾습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공적인 문서를 작성해야 할 때나, 아니 학교 관련 서류, 병원 관련 서류, 뭐 시시콜콜하게 Emergency  contact을 요구하는 경우가 꽤 많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에는 나 하나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이곳에, 긴급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을 쓰라는 그 빈칸이 참 당황스러웠다. 이곳에 가족도 없고 친한 친구도 없는데, 이 빈칸을 뭘로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 


학교 입학처에서 아이디 카드를 만들 때, 은행계좌를 열 때,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 갔을 때, 아파트 렌트 계약을 하고, 정기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을때, 난 늘 이머전시 컨택을 억지로 쥐어짜서 써내야 했다. 언젠가 같은 과 언니와 함께 무슨 서류를 작성하러 갔었는데, 나처럼 "없는" 이머전시 컨택을 만들어 내야했던 그 언니와 쿨하게 담합했다. 이제 언니와 나는 서로의 이머전시 컨택이 되어주기로. 아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고모나 이모도 아닌, 만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은 과 동기 언니와 이머전시 컨택이 된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묘했다. 



어쨋든, 우선 그렇게 시작하고 나니 편해졌다. 


이젠 언제 어디서든 이머전시 컨택을 요구하는 그 어떤 서류에도 당당히 그 언니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심지어, 언니의 아들 어린이집에 이머전시 컨택으로 내가 지정되기도 했으니, 우리가 서로 모르는 꽤 많은 서류들에 우린 서로의 이름을 적어놓았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언니, 오늘 여기 여기에 언니를 이머전시 컨택으로 썼어" 라고 전화를 하다가, 다음에는 톡으로 대시 보내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알리지도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수십개의 서류에 언니와 나는 "사이좋은" 이머전시 컨택으로 자리잡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언니 덕분에 한 5년간의 이머전시 컨택은 편하게 해결되었다. 그간 생긴 남자친구 역시 이머전시 컨택을 2개 써야할 상황에 큰 도움을 줬다. 언니와 남자친구 연락처로 이머전시 컨택을 간신히 연명하다가, 어느날 언니가 졸업하고 미국을 떠나게 되었고,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어 버리고 난 후, 난 다시 이머전시 컨택을 구해야 했다. 한 집에 살지 않는 이머전시 컨택을 써야했으니, 남편이 된 남자친구의 연락처는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고, 미국에 살지도 않는 언니의 연락처를 쓸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긴급연락처라는게 평소에 계획을 하거나, 미리 누군가와 담합하여, “앞으로 당신 연락처를 이머전시 컨택으로 써도 되겠냐” 뭐 이런 허락을 받아놓는 게 아니라서, 항상 급히 서류작성을 완료해야 하는 그 순간, 병원 수납처나 은행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발을 동동 굴리며 전화기의 연락처를 훑어 나가기 마련이다. 어쩔 때는 에라 모르겠다, 우선 전화기의 컨택을 쭉 훑어보고 나서, 당장 오늘 내일 여기 떠날 것 같지 않은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임의로 적어 넣은 적도 있다. 물론, 그들에게 나를 “긴급”하게 찾는 연락은 단 한 번도 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좀 죄송한 마음이.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을 때, 나는 또 이머전시 컨택을 써야 했다.  

아이와 관계가 되는 것이니만큼 아무나(?) 막, 또는 아무런 동의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쓸 수는 없었다. 서류를 작성하다 말고 가만히 생각해봤다. 아주 만약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남편과 나에게 피치 못할 일이 생겨서, 아이를 제 3의 누군가에게 픽업하라는 연락이 가야 한다면 … 가족이라고는 달랑 우리 뿐이라,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아이의 긴급연락처가 되어야 한다면 더더욱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더욱 이머전시 컨택을 쓰라는 그 빈칸이 진심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미국에 산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이머전시 컨택은 나에게 끝나지 않는 숙제이다. 아주 최근엔 우리 둘째 여권 만드는 데에도 또 이머전시컨택을 적어내야 했다. 가족과 함께 살지 않는 이민생활을 하는한, 나는 매번 계속 이렇게 “이머전시 컨택 찾기”를  계속해야 할것 같다. 




Photo by Quino A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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