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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Jul 17. 2022

나는 아내에게 묵은 불만이 있다

여지껏 한 번도 물국수 말아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를 하던 어느 날, 퇴근 시간이 늦어져 점심밥이 어중간했다. 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집에 가서 먹기에는 너무 배고팠다. 나는 버스 정류장 옆 단골 식당에 들어가 물국수 곱빼기를 시켰다.


가까운 곳에 맛있는 국숫집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잘 우려낸 장국에 쫄깃한 면, 그 위에 맛깔스러운 고명을 올린 물국수가 나왔다. 게 눈 감추듯 한 그릇 잘 드시고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왔다.


그런데 식구들은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서둘러 밥상을 차렸다. 나는 차마 먼저 먹었다고 말할 수 없어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또 국수였다. 아내는 곱빼기나 다름없는 물국수를 내 앞에 내놓았다.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냉큼 한 그릇을 비웠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국물을 그릇째 들어 후루룩 마실 때, 아내는 또 한 그릇을 말아 왔다.


 '내 사전에 국수 한 그릇은 없다. 돌아서면 배 꺼지는 국수는 언제나 두 그릇이어야 한다!' 고 평소에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려 세 그릇째를 먹자니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다. 어쨌든 세그릇을 넙죽 해치우고 나니 슬슬 엉뚱한 불만이 생겼다. 아내는 내가 좋아하는 국수에 너무 무관심하다. 우리 집 국수 맛은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달라진 게 없다.

   

식탁에서 물러앉아 그렇게 머릿속으로 불평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온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다음 주 토요일에는 볶음 우동 한번 만들어볼까..."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옆에 있던 딸내미가 좋아했다.

"볶음 우동이라고요? 이름만 들어도 맛있겠어요!"

아들도 기다렸다는 듯 환호했다.

"아싸, 가오리!"

허 참! 꼭 그러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해본 소린데 애들이 왜 이러나 싶었다. 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나는 뱉은 말을 주어 담지 않았다. 겁도 없이!


 나는 며칠간 인터넷을 뒤져 온갖 우동 조리법을 숙독했고, 그날 아침에 슈퍼마켓 식품코너에서 새우살 조갯살 등 다양한 요리 재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A4용지로 출력한 레시피를 주방 눈높이께 딱 붙여놓고 앞치마를 둘렀다.


썰고 삶고 데치고 볶고 오로지 레시피가 시키대로 충실히 따랐다. 그랬더니 마침내 ‘아부지 표 볶음  우동’이 나왔다.   

  

내 생애 첫 작품이 식탁 위에 올랐다. 맛있는 향기와 색색깔 고명! 뭔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맛이 별로였다. 볶음 우동은 쌈박하면서도 화끈해야 하는데 맵고 걸쭉했다.


원인을 찾아보니 당연히 우동면이어야 할 것을 칼국수 면을 사용하는 상식 이하의 짓을 한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너무 매워 눈물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나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 착한 마음들이 고마워서 나는 또 헛소리를 했다.

"다음 주에는 진짜 맛있는 작품을 만들어 볼게."

대체 어쩌자고!  


일주일 후, 나는 다시 앞치마를 두르고 심호흡을 하였다.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우리가 보통 먹는 물국수를 만들기로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먹은 국수가 수 백 그릇은 될 터이니, 가족 앞에 내놓을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물국수는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야끼 우동 만들 때처럼 재료를 한 번에 볶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무려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하는 고난도의 요리였다. 더구나 아내는 외출하고 없었다.


나는 1단계 장국 만들기부터 허둥댔다. 멸치만 넣고 끓이면 장국이 되는 줄 알았는데 조리법을 보니 반드시 다시마를 함께 넣어야 했다. 다시마를 찾아 주방을 이 잡듯 뒤졌지만 아까운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아내한테 전화를 해서 장국을 만들었다. 장국이 이상했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을 기대했건만 심심하고 텁텁했다. 괜찮아. 괜찮아. 이 또한 별미가 되리니. 통과!


2단계에 양념장 만들기 단계에 들어서자 눈이 어지러웠다. 다진 마늘 5쪽, 다진 생강 3쪽, 대파 1/2대 간장 1큰술, 설탕 1작은술, 다진 파 1큰술, 다진 마늘 1/2 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깨소금 1큰술, 후춧가루... 휴! 국수 양념장 한 종지를 만드는데 왜 이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비 찾은 중처럼 줄곧 궁시렁거렸다.  국수를 한 번도 안 만들어 본 사람은 절대 뭐라고 토를 달지 말아야 한다. 웃을 일이 아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늘을 깠다. 몇 개 못 까고 손끝에 불이 났다. 더구나 깐 마늘을 꼬마 절구에 찧으니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가 남는 게 없었다. 그렇게 몇 차례 버벅거리다가, 결국 달걀 노른자로 지단을 부치는 과정에서 한계에 봉착했다.


달걀 지단이 구겨진 내 마음처럼 자꾸 흐트러졌다. 지단 부치느니 차라리 물티슈로 빈대떡을 부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아내는 이 상황을 예측하고 피신한 게 아닐까.  


고명 만드는 단계를 얼렁뚱땅 넘기고 바로 국수 삶았다. 삶은 국수를 건져 물기를 빼고 아까 만들어놓은 장국과 양념장을 부었다. 그래도 뭔가 느껴지는 아쉬움은 깨소금으로 보완하고 마지막으로 실고추를 살짝 얹어 격식을 차렸다.


하지만 정성은 맛에 비례하지 않았다. 너무너무 맛이 없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오로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아부지표 국수를 먹어야 하는 아이들을 보며 통렬히 반성하였다.


물국수 한 그릇을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생각해보니 소소한다고 여겼던 부엌일이 다 그랬다. 감자 껍질 벗기기, 콩나물 다듬기, 마늘을 까서 적당하게 빻기, 고구마 줄기 벗기기, 멸치 똥 따기 등은, 소소한 가사 노동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행위 예술이자 무한 봉사활동이었다.


나는 끼니마다 밥상을 차리는 세상에 모든 여성 또는 남성들에게 마음 깊이 존경을 드렸다. 이제 아내가 제공하는 모든 먹을거리에 불만이 없다. 요즘은 가끔 식사 후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하는 무수리 역할로 만족할 뿐, 괜히 주방 근처를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절대로! 대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 만든 반찬이나 특이한 식단이 올라오면 얼른 한 숟가락 맛보고 속 보이는 아부를 잊지 않는다.

"오, 쥐기는데!"

"따봉!"

기분이 좋아 더 아부하고 싶을 때는, 첫 술을 뜨고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아내를 향해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무릇 요리의 완성은 대접받는 이의 약간 과장된 표정연기이니까.

   

국수 한 그릇 만들어 보니, 나는 아직도 성급하고 참을성이 부족하며 대책 없이 큰소리만 치는 마초 기질이 농후함을 알았다. 그리고 늘그막에 윤기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내 나름대로 별미 하나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했다.

 단, 물국수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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