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의 흥행 파장은 컸다. 대중교통 옆자리 아저씨는 흑백요리사와 MZ 트렌드 간의 연관성에 대한 뉴스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양반이지, 요즘 흑백요리사를 제목에 달아 놓고선 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쓰레기 기사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마스터셰프코리아 시리즈의 큰 팬으로서 예능계에 근 10년 만에 등장한 첫 요리 경연대회에 대한 설렘이 컸다. 높은 기대에도 넷플릭스답게 시리즈 내내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구성을 짰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좋은 면이 훨씬 많은 프로그램이었다고 생각한다.
흑수저 결정전 - 1vs1 흑백 대전 - 흑백 팀전 - 편의점 - 유투버 - 인생 요리 - 무한 요리 지옥 - 파이널
이상의 8개 라운드별로 각각 인상적이었던 순간을 하나씩 선정하고 선택의 이유를 간단히 곁들여 봤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1라운드: 흑수저 결정전
수많은 밈을 탄생시킨 '이븐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 그 장면.
기본기 없는 낭만은 걍 고집이다. 안성재가 깔끔하게 딱 심사평만 하려다 마지막에 충고 한 마디 얹는게 압권임.
2라운드: 1vs1 흑백 대전
全 라운드 중 2라운드를 가장 흥미롭게 봤다. 매 대결이 긴장감 넘쳤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냥 이 포맷 그 자체다. 블라인드 포맷으로 계급론의 실상을 파헤쳐 보겠다는 시도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대박이다: 백수저가 이기면 '역시 백수저', 흑수저가 이기면 '골리앗을 꺾은 다윗'.
더불어 참가자뿐 아니라 심사위원의 맛 구별력까지 평가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 포인트도 줌. 특히 안성재에 대한 백종원의 심사력은 비교열위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본 시청자들이 많았을 텐데, 2라에서 자기 전문인 각종 중국요리에 사바용같은 비전문 분야까지 간파하면서 그런 의심을 완전히 불식시켰다.
그리고 이 포맷 덕에 "으어? 빠쓰네?" 명장면도 탄생함. 요즘은 이렇게 딱 한 클립만 SNS에서 흥행시킬 수 있다면 수많은 신규 시청자를 시리즈로 유입시킬 수 있다. 그 시청자를 계속 묶어두느냐 마느냐는 시리즈의 완성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3라운드: 흑백 팀전 재료의 방
에드워드에 대한 호감이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승리해서 묻히긴 했지만 에드워드가 제기했던 미역크림수프의 문제제기—TOO BORING—는 유효했다. 심지어 어처구니없는 계산 실수로 요리의 핵심 프로틴 중 하나인 관자가 지나치게 얇아지기도 했고.
이 지점에서 에드워드는 단순히 불만만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하라는 직위에 걸맞게 현실적인 대안—관자를 찌고 광어를 굽자—도 제시한다. 그것까지 보스한테 반려당하자 순순히 이를 받아들이는게 참 멋있었다. 그러곤 뒤에 가선 보스 고집쟁이라고 일개 '직원 1'마냥 툴툴댔다.
한편 한 번 밀어붙이기로 한건 끝까지 가는 최현석의 승부사적 면모도 참 대단했다. 이게 대단한 이유는 패배 시의 도의적 책임을 모두 자신이 부담하고 팀원들은 요리에만 집중하도록 하는 거기 때문. 졌으면 고집 세다고 욕 엄청 먹었을 텐데 그것까지도 감안하고 승리에 베팅한 거다. 최현석은 이 미션에서 가리비 선점한 거나 자존심 굽히고 대파 빌려오는 거나 계산실수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나 에드워드 의견 씹은 거나 다 승리를 위한 행동이었다. 그 판단이 맞았냐 틀렸냐를 떠나서 걍 그럴 수 있는 깡이 대단함.
패자부활전: 재료의 방 <편의점>
빠르게 지나가서 묻혔던 조은주 셰프의 편의점 미션 요리다. 편의점 미션 요리라는 걸 안 알려주면 그냥 어디 양식당 요리라고 생각할 듯. 나이 들어서 편의점 신상 같은거 잘 모르는 63 빌딩 헤드 셰프가 재료도 못 찾고 편의점 안에서 레스토랑 신입처럼 얼타더니 결국 아름다운 다이닝 요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약간 뭉클했다.
4라운드: 흑백 혼합 팀전 레스토랑 미션
잘 만들어 놓고 굳이 욕심부리다 제작진이 말아먹었던 시리즈의 오점. 욕할 거리는 다들 알고 있을 테니깐 생략하겠다. 제작진은 4팀 중에 한 팀만 전원 탈락이니 방출팀이 그중에 하나는 안 되겠지라고 판단하고 무리수 건 듯.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명이서 인원수 4명인 다른 팀들을 이기라는 건 너무했다고 본다. 당장 앞에 팀전에서도 인원수 많은 팀들이 두 번 다 이겼는데..
이 장면 뽑은 이유는 부연할 것도 없고 걍 정지선 저 한마디에 치여서다.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단일구문인 듯.
세미파이널 1차: 인생을 요리하라
트리플 스타는 1화 때부터 보법이 달라서 시리즈 내내 보는 즐거움을 너무 크게 선사해 준 흑수저였다. 미국에서 살다 오니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미국에서 도전을 했던 사람들에 대한 애착이 팍팍 생긴다. 사담도 일절없이 기계적으로 요리만 할 것 같은 요리 괴물이 어렸을 적에는 자기 직업에 대한 열정 하나로 미국에 떠나서 잠도 희생하면서 요리 공부에 열중했댄다. 뭐에 그렇게 미쳐서 콜로라도대에서 아무런 실속 없는 Straight A 한번 받아보겠다고 눈까지 베려가며 공부했던 작년의 내가 오버랩됐다. 다이닝 푸드만 먹을 것 같은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은 흔하디 흔한 피어 39의 클램차우더랑 멕시칸 음식이라니. 안성재조차 한국 뜨기 전 맛봤던 급식 기억에 감동버튼 눌리는 걸 보면 모든 인간은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다.
세미파이널 2차: 무한 요리 지옥
두부 별로 안 좋아한다는 사람이 두부 가지고 코스 요리를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짜셨어요.. 특히 관자랑 곁들였던 건 충격적이었다. 이 사람이 음식을 보는 시선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건지 궁금함. 두부 퍼먹는 장면이나 집게로 두부 커팅하는 장면, 유자 두부브륄레 했던 것도 매우 인상깊었다. 맛피아가 군대에서 좋아할 만한 눈치 빠른 재치형 인간이라면 이 사람은 최상의 기본기를 가지고 백의종군해서 요리를 만드는 알파고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파이널: 이름을 건 요리
그런 대가가 이렇게 당장이라도 괴성을 지를 듯이 온 힘을 다해 한국의 요리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 나로서는 그 동력의 크기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가족들도 다 집에 두고 촬영 때마다 켄터키에서부터 혼자 최소 30시간씩 비행하고 왔을텐데..
파이널에서 굳이굳이 안 얼까봐 걱정되는 떡볶이 요리를 한 것도 인상깊음. 승우아빠만 봐도 아이스크림이 녹을까봐 쫄려서 레시피를 수정하다 결국 탈락했다. 에드워드는 현지 냉동고 세부출력도 모르는데 결승에서 이런 모험을 걸었다는 게 앞선 평가절하와는 대비되는 '기본기 있는 낭만'이다 싶었다. 에드워드는 세미파이널에선 기본기에 기반한 창의력, 결승에선 기본기에 기반한 낭만을 보여 줬다.
미국은 정신 나간 놈들도 많고 한심한 새끼들도 한 트럭 있지만 아주 가끔씩 매우 건전한 삶을 살고 있는 중년의 어른들이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프로페셔널하면서도 가정에 충실하고,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세미파이널에서부터 '만약 지면 집에 가면 될 일'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데, 필자가 추구하는 盡人事待天命의 원칙에 잘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일그러진 얼굴로 칵테일 셰이커를 흔드는 盡人事, 고개를 떨구고 결과를 기다리는 待天命. 사람들이 세미파이널 룰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유도, 제작진이 준우승자 서사를 희생할 수 없었던 이유도 결국 에드워드라는 인간이 가진 힘이 너무 강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