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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Oct 01. 2017

안경점 아저씨

침대에 안경이 놓인 것을 깜빡하고 내 두 엉덩이는 거침없이 자유낙하를 했다.

'아이코...'

그게 없으면 뿌연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나는, 새 눈을 찾아 오전에 시간을 내어야만 했다.


'잠시 외출 중이오니, 용무가 있으신 분은 010-XXXX-XXXX...'

나를 반겨준 건, 오른쪽 아래 45도 각도로 기울여 인사를 한 메모패드였다. 연락을 드려볼까 하는데, 때마침 기분 좋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런 가을 색체의 바람은 어디론가 계속 걷고 싶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나는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이끈 방향은 학창 시절 숱하게 다녔던 길이었다. 그때의 추억이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새록새록 노크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잠깐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려니 안경점 문이 두 팔을 벌려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안경테부터 골라야 하는데, 마음에 둔 형태나 재질이 있는 건 아녀서 시간이 좀 걸렸다. 매장을 가로지르며 한참을 보물찾기 하던 내게 아저씨가 다가왔다. 안경점 아저씨는 내게 뭐가 유행인지, 사람들이 어떤 걸 많이 사는지 등 상세히 알려주려고 노력하셨다. 안경을 비싸게 팔고 자신에게 많이 남기는 것만 생각했다면, 내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걸 권유할 법도 한데 아저씨의 설명에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고른 테와 검안을 하고는 안경이 만들어지기까지 푹신한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도수가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시간은 길어졌다.




새 눈을 되찾은 나는 또렷해진 세상이 너무 반갑고 신기해 어린아이처럼 여기저기로 눈을 굴렸다.


"여기서 오래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저 어릴 때부터 왔는데 아직 그 자리 그대로 하시네요."

"아 그렇죠? 그러고 보니 제가 아들을 낳았을 때부터니까 햇수로 26년이네요."

"26년요?? 우와. 진짜 26년이면 안경점이 곧 아들 같으시겠네요. 이 자리에서 그동안 가족을 지켜오신 거고. 뭐랄까.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견뎌내고 애착도 많을 거 같아요."


시간을 재어보진 않았지만, 대화의 물꼬가 트인 우리는 그 자리에서 대략 30 여분은 이야길 주고받았던 것 같다.


"결혼해서 다른 지방에 가신 분들이 찾아오기도 고, 졸업한 학생들이 일부러 버스 타고 와서 방문해주기도 해요. 참 감사하죠."


아저씨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참 고맙다고 진정성 있게 다루어 말씀을 이어갔다. 길다면 긴 세월을 한 자리를 지키면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지 내가 조금이나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저씨의 말들에서 정말 감사한 마음을 지녔다는 걸 알 수 있는 단서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일상의 소소한 데서 오는 고마움을 잘 간직하시는 것 같았다. 이야길 나누다 보니 아저씨의 모습에 괜스레 내 마음도 데워졌다. 나는 이런 분들이 누구보다 더 행복하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나저나 어릴 때부터 제가 봐 온 아저씨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이신 거 같아요. 빈 말이 아니라, 정말 그 정도 연세로 안 보여요."

"하하, 고맙습니다."


아저씨는 그래도 요즘 자기도 나이 들어가는 걸 많이 느낀다며, 마음은 안 그런데 어느새 이만큼이나 되어 있다고 하셨다. 세월의 무상함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게도 금방 전염이 됐다.


"그런데 Z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제 나이요? 내가 몇 살이더라... 음, 저는 XX년생입니다."

"(혼잣말로 계산해보시며) XX년생이면 몇 살이지..."

"아, 제가 평소에 나이를 그리 생각하고 살지는 않아요. 그거 세고 있다 보니까 지금은 뭘 해야 돼, 지금은 뭘 할 수가 없어하며 계속 스스로를 가두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소개를 할 때 XX년생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다녀요. 저보다는 나이에 더 관심 많을 사람이 알아서 계산해라? 는 생각으로 말이죠."

"아, 그거 참 좋은 방법이네요. 하하, 내가 젊은 사람한테 하나 배웠네."


조금이라도 기운을 내게 해드린 것 같아서 내 기분 역시 그렇게 됐다.


아저씨와의 이 시간은 내게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이 아닌, 존재와 존 마주하고 대화를 나눴다는 느낌으로 기억되었다. 어느 정도 대화의 소재가 떨어질 무렵, 점심때가 다 되어선지 배에서 꼬르륵 신호를 보내왔다. 기분 좋았던 시간을 뒤로하곤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또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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