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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Sep 24. 2016

지진은 모든 걸 작게 만들었다

조금 떨어져서 보기




S#1 지진

창가가 좋다. 그렇다고 햇빛 바로 아래에 책상을 두기는 힘들다. 햇살이 들른 곳에 살짝 기댄 위치쯤이면, 창 밖을 바라보며 잠깐 멍~ 하기도 좋고, 실내에서 비타민 D를 챙길 수 있는 것 같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그런 창가가 좋다. 나는 그런 창가에 앉아있었다. 기온은 여름이었지만, 절기상으론 가을이 이미 시작된 그날 저녁은 일찍 해가 떨어졌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

"?"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입구가 위에 있고, 연식이 오래된 세탁기를 바로 옆에서 탈수하는듯한 진동이 창가 전체로 퍼져나갔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멈출 줄 모르는 그것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몰고 와 점점 고조시켰다. 마침 창가여서 벽의 엄청난 흔들림을 생생히 느낄 수 있어 더 그랬다. 책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보다 길었던 흔들림이 진정되었을 때쯤엔, 지인과 주고받던 카톡이 전송되지 않았다. 반면에 인터넷은 된다. 무슨 오류인가 싶어 잠시 뉴스를 보고 있는데, 지진이라는 속보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끝이 아니었다. 방금 전의 그 엄청난 진동이 그치고 얼마 안 있어 또 흔들림이 느껴진다. 이 것의 정체가 지진이라는 걸 알았으니 당장에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정도로 느껴본 지진은 처음이었고, 이는 내 정신을 충분히 앗아갔다. 나는 겨우 핸드폰만 챙길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신기하게, 달려 나가는 순간에 몇 가지 생각이나 장면들이 머리 속에서 지나갔다.


'내 마음에 꼭 드는 그걸로 해야지'

'동창회에 이런 정도는 갖추고 가야겠지'

'이런 방향으로 나갔을 때에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이런 생활 속 여러 고민들이나 느끼는 감정들이 참 볼품없게 느껴졌다. 마치 해탈한 수도승이 된 마냥, 내가 작았다고 느껴졌다. 그 짧았던 시간 중에 말이다. 이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잠시 도로 한가운데에 서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좀 더 심해지면 저기 어딘가로 달려야겠다는 구상을 했다. 오늘의 진동은 웃음으로 넘기기엔 그 정도가 컸다. 이건 큰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됐다.




S#2 등산

잘 풀리지 않는 일들로 머리가 지끈할 때였다. 뭔가 스트레스를 풀 거리를 찾다가 동네의 작은 산을 오르기로 했다. 도중에 힘이 들면 드는 대로, 느리더라도 가급적 쉬지 않고 정상을 향해갔다. 그렇게 올라가고 있으니 땀이 옷을 적셨고, 온몸 구석구석의 근육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숨이 많이 차오르고, 진이 빠지는 순간도 왔다. 이렇게 몸을 데우면서 정상에 도착하니, 당장에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금방 땀이 식고 근육들의 피로도 회복되는지, 스트레칭 후의 개운함 같은 게 느껴졌다. 이런 운동 후의 개운함은 알게 모를 마음의 진정 효과가 있다. 긴장되어 있던 정신의 팽팽함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준다. 정상에서 시내 전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 들었다. 저 많은 건물들 중에 하나, 그 하나 안에 작은 내가 이 걱정들을 안고 지냈구나. 개미 같이 보이지도 않는 내가.






우물 밖 개구리 효과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든 공부를 하든, 경험이나 경력을 쌓다 보면 숙련자가 된다. 이때가 되면,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지금의 모습에서 부족했던 과거를 떠올려 보곤 한다. 얼마나 엉뚱했고, 실수를 그렇게나 했는지를 돌아보다 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고, 당시엔 심각했지만 지금 보니 귀여워 보이는 것들도 있고, 그래도 잘 버텨내서 지금의 내가 있구나 하며 위로도 해보게 된다.


그렇게 경험이나 경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걸 알게 해 주고,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다. 예전에는 못 봤던 것들을 보게 해준다. 어떤 분야에서 활동 중인데 남들의 눈엔 별 볼일 없는 듯한 사람이, 내가 그 분야에 경력을 쌓게 되면, 저것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의 결과물인지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시골에서 서울로 갓 상경했을 때에 접하게 되는 미로 같은 지하철 노선도, 첫 해외여행을 가면서 알게 되는 수많은 문화나 풍경들, 내가 꽤 잘하는 줄 알고 나갔던 전국구 대회에서 보게 되는 고수들에 대한 경험들은 머리 속에서 유리창을 깨는 듯한 인식을 안겨준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우물 밖으로 나와 보면, 내가 담고 있던 세계에 대한 그릇의 크기를 인지할 수 있다. 이를 가늠하게 되면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진달까. 그동안 아등바등 거리며 살아온 내 모습이 보이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내 에너지를 그렇게 쏟아부은 건 아닌가 싶다. 그냥 이대로의 나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하며. 혼자인 줄만 알았는데,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도 싶고, 그동안 많이 응석을 부린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 분발할 의지를 다지기도 한다. 얼마나 내가 최고인 줄 알며 자만하고 오만했는지를 깨닫게 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자연스레 고개가 숙여진다. 큰 물에서 놀고 싶은 마음도 든다. 거기에 있으면 자기 역시 그렇게 되는 것 같은,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어떤 형태의 우월감이나 자존감의 향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따분한 지금까지의 작은 세상을 뒤로하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무언가 큰 일을 겪거나 더 넓은 세상과의 접촉은, 이를 접하기 전에 고민했던 일들이 참 아무것도 아니게끔 느껴지게 해준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과 함께, 행복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건넨다.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한 물음을 던져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연히 몇몇 매체를 통해서, 자살을 하려고 다리 위에서 뛰어내렸다가 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길 접한 적이 있다. 그중에서 플로리다 대학교의 Thomas Joiner 교수는 이 생존자들과 면담을 시도했었다. 통계적으로, 다리에서 뛰어내려 생존할 확률은 2% 로 매우 낮았지만, 어찌 되었든 기적적으로 생존 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었다. 어찌 된 게, 그들은 한결같이 수면에 닿기까지 4 초간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고 한다. 발을 지면에서 떼는 순간, 얼마나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고, 죽고자 했던 충동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훨씬 강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뛰어내린 순간 나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냈다는 사실만 빼고"

"뛰어내리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였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관찰자가 되어보기


살아가다 보면, 내 에너지를 코 앞의 현실에 많이 소진하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은 기쁨에 가까운 긍정적 소모일 수도 있지만, 경쟁에서 오는 좌절 혹은 시기 같은 부정적 소모일 수도 있다. 긍정적 방향으로 에너지를 소진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재충전해준다. 반면에 부정적 방향의 소진은 한 생명을 쉽게 내버릴 수도 있게 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내 시선을 '내 두 눈에서' 출발해 이들이 나를 어찌하고 있냐에 두는 것보다, 3인칭이 되어서 지구 밖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걸 상상해보면 어떨까? 내게 어떤 어려움이 던져졌는데, 나는 그것을 접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며, 어찌 대처를 하고 있었는지를 3인칭 관찰자가 되어서 군중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 말이다.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쉬워지고, 그로 인해 좀 더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이성적이고 올바른 선택이나 대처를 하는데 힘을 실어준다. 덜 스트레스를 받고 흔들림이 없는 초연한 내가 되기 수월해진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 Charlie Chaplin




사람만이 느끼는 건 아닐 것이나, 감정이란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 같다. 이것은 때때로 비효율적이고,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선택을 이끌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오롯이 이성적일 수만은 없는 이유는, 감정은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의 초석이자 수없이 많은 형태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 아닐까. 가끔은 자기 파괴적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럴 때마다 담담히 나를 바라볼 수가 있다면, 스스로를 지키고 잘 추스르는데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너무 눈 앞의 상황들에 일희일비하고만 있는 건 아니었는지, 기분에 취해 중요한 건 잊고 있던 것은 아닌지 나를 지켜볼 수 있는 눈들을 가졌으면 좋겠다.





좀 더 소중한 것들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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