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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Oct 01. 2016

당신은 당신대로 참 괜찮다

취향은 존중해주기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나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가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럴 수는 있겠지만, 절대다수가 그러지 않는다. 혼자 산다는 것은 문명사회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지에서 자급자족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 벽의 콘크리트나 가전제품 등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혜택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우회해서라도 받고 있다. 따라서 타인과의 생활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일란성쌍둥이라도 각자에게 발생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까지 같지는 않아서 유전자의 어느 부분이 조금이라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겪는 일이나 처하는 환경이 달라 형성되는 성격이나 성등이 100% 같을 수 없다. 복제인간이 있다고 해도 같은 이유로 완전히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은 어떤 관점으로 봐도 내가 아닌 타인이다. 나와는 다르다.


피할 수 없는 나와 다른 타인과의 삶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마찰이 빚어지길 마련이다. 어떤 현상을 두고 완벽히 같을 수 없는 각자의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갈등이란 그 크기를 고려않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게 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우열에 대해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은 내재된 욕구가 있다. 무슨 분야가 되었든, 내가 누군가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것이다. 우월하다는 것은, 더 많이 누리며 생존하기 쉽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기본적으로 우월함을 갈망한다. 이는 사람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물계 전반을 지배하는 욕구 중 하나다. 모든 생물은 욕구를 채우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나를 칭찬해주는 말들이나 평가는 어떤 부분이든지 내가 남들보다 괜찮은 부분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근본적으로 파고들어보면, 더 많이 누리며 생존하기에 유리한, 우월함에 대한 욕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빈 말이면 그렇지 않다.




타인으로부터의 영향


아무개 A(이하 A로 표기)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해보자.


'넌 참 못 생겼다'

'넌 참 더러워'

'넌 성격이 고약해'

'왜 그리 놀면서 하니'


이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썩 좋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왜 기분이 나빠졌을까? 세세하게는 다르지만, 결국에 이것들이 말한 것은 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내가 어떤 부분이든지 열등하다는 것은 더 적게 누리거나 생존에 불리함을 말한다. 이는 더 나아지고자 하는, 생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긴장과 동시에 에너지를 쓰게 한다. 힘이 든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이를 들여다보자. 내가 A의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진 것은, 그의 말에 내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A가 나를 못 생기고, 더럽고, 성격이 고약하며, 열심히 잘 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고 했다면, 내가 정말 그렇게 되는 건가?




사실의 상대성


컵이 하나 놓여있다. 바로 아래 사진 하나를 보고 잠시만 생각해보자. 컵은 어떤 모양인가?



컵은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정면으로 보면 사다리꼴이고, 비스듬히 보면 사다리꼴과 부채꼴의 중간 형태의 다각형이 된다. 모양뿐만 아니라 이 컵이 무슨 컵이냐도 생각해보자. 볼펜 등의 문구류를 넣으면 꽂이가 되고, 커피를 넣으면 커피잔이, 흙과 다육식물을 심으면 화분이 된다. 이처럼 내가 어디서 바라보냐에 따라, 거기에 무엇을 담을 것이냐에 따라 컵의 정체성은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컵이 이미 가지고 있는 모습이란 한 가지가 아니다.



나는 절대적인 사실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각자가 인식한 바에 따라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낼 최상의 방법은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의 시각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Paulo Coelho, <포르토벨로의 마녀> 中




취향 고백과 사실의 구분


어떻게 나랑 같을 수 없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호적으로만 생각해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못 생겼고, 더럽고, 고약하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A의 취향에 대한 고백이었을 뿐이다. A에게도 그 나름의 규칙이나 사정, 기준 등이 있을 것이다. A는 그만의 이러한 것들로 나를 판단했던 것이고, 거기에 내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내가 A에게 '너 왜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해'라고 하는 것에는, A만의 생각을 인정해주지 않고 나를 좀 더 좋게 말해달라는 욕구가 담겨 있다. 내가 더 높아지고 싶은 동시에, 상대의 생각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A의 취향이나 기준들을 바꾸고자 한다고 과연 바뀔까? 타인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바꾼다 한들, 왜 나는 타인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으면서, 타인은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니까 A의 취향에 대한 고백에 왈가왈부하지 말자. 그가 내린 나에 대한 평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자. 그의 생각을 존중해준다 기분 나쁠 것도 없다. 우리는 모두가 다른 사람이다. 저마다의 규칙, 사정, 기준 등이 같지만은 않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많은 경우 비난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난하는 사람의 불행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도 이렇게 하십시오. "너 어떻게 그렇게 서운한 소리를 하니?" 이것이 아닌, "네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좀 서운한 마음이 든다." 즉, 말할 때 상대를 향해 비난하는 투로 하지 말고, 나의 상태만 묘사하십시오. 이것이 좋은 대화법입니다.

혜민,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中


다만, 사실에 대한 것에는 오류가 있냐 없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다. 내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하는 것은 A의 취향이었지만, 내 행위나 사실을 가지고 나를 평가할 때는 이를 짚고 넘어가면 된다. A가 내게 '너는 못 생겼는데, 도둑질까지 했어' 라 말했다고 하자. 도둑질을 했냐 안 했냐는 그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일이 발생했냐 안했냐에 대한 말이다. 이를 못 알고 내게 말했다면 그건 A의 잘못이고, 제대로 알고 내가 잘못했던 것을 내게 말한 것이라면, 그건 내 잘못이나 오류를 대신 발견해주고 알려줘서, 내가 찾으러 갈 수고를 덜었기에 고맙게 생각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마찰이 어떻게 봐도 꼭 기분 나빠질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내가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느냐가 아닐까.




당신은 이미 아름답다


스마트폰의 카메라든, DSLR 이든, 일회용 카메라든 처음 사진을 찍어보기 시작하면, 보고 있던 눈 앞의 장면이나 순간들이 버튼을 누르는 대로 기록된다는 게 신기하다. 그러다 관심을 더 갖고 각종 용어들에 대해 익숙해지며 많이 찍다 보면, 달라져 가는 결과물에 더 재미를 붙일 수 있다. 점점 좋은 순간이나 구도를 원하게 된다. 멋진 한 장면을 얻기 위해서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해보게 된다.


한 피사체를 두고 어찌 찍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찍어보고,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측면 상단에서 등 여러 방향에서 찍어봤다. 다음으로 찍는 장소를 바꿔가면서도 찍었다. 카페 테이블 위, 나무 선반 위 접시들과, 작업하는 컴퓨터 모니터 근처에 자연스럽게 놔두고 찍어보면서 베스트 컷을 향한 몸부림을 쳤다. 한 피사체를 두고 수십 장을 찍어보고, 괜찮은 장면을 건지고는 흡족해했다.



그때였다. 문득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피사체를 찍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카메라로 피사체를 화면으로 담아낸다는 것보다는, 이미 그것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어떤 순간이나 구도에서 찾아낼 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사진 촬영이라기보단, 아름다움의 포인트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어떤 사람을 보고,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가는 경우가 있다. 그건 쉽다. 내가 그 사람의 어떤 매력을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니까. 정말 싫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와 정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오래간 함께 지내다 보면 가끔 의외의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조금 이르게 정의 내려 버린 것에서 그 사람의 매력을 찾는 데 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우리는 모두 이미 아름답다. 다만, 어디서 바라보냐에 따라 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못 찾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그걸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를 좋아해 줄, 내가 간직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사랑해 줄 사람이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이 사람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가 직접 내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긴 하다. 벌써 1 명이 발견하고 가는 거니까. 나를 사랑하는 것은 거기서부터다. 행여 내 진짜 매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당장에 안 보인다고 풀죽지 말자. 이것을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까.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로부터 미움이나 시기,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모든 게 나와 다른 타인과의 삶 속에서는 이를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각자의 취향, 규칙, 사정, 기준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사람들 모두 서로의 이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그 하나하나에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를 좋지 않게 평가한다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너는 너, 나는 나였으면 한다.





우리는 서로가 달라도 함께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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