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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풀 Oct 08. 2016

샤갈로부터

더 나은 표현 고르기




고등학교 시절, 수능을 치르고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까에 대해 기대 섞인 걱정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수시에 합격했던 친구들은 이미 자기가 하고 싶어 했던 일들을 찾은 것 같았지만, 나는 여느 친구들처럼 당장에 무얼 해야 될지 감이 그리 안 잡혔다. 지금까지는 해야 될 것이 분명했고 그것만 하면 됐는데, 그러다 갑작스레 던져진 자유였다. 앞으론 좀 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금방 떠오르는 답은 없어서 약간의 관심을 두고 있던 미술에 대한 책을 뒤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Marc Chagall (이하 샤갈로 표기)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관심은 있지만 전혀 아는 게 없어서 그랬는지, 책장이 그리 빨리 넘어가지는 않았다.


얼마 뒤 인터넷을 검색해보던 중에, 부산에서 샤갈 전시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잘됐다 싶어 계획을 짰고, 다행히 폐막 전에 둘러볼 수 있었다. 내 의지로 직접 간 전시회는 처음이었고, 무엇을 어떻게 봐야 될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들 앞에서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거나 저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보는 거였다. 관람 시간은 꽤 길어졌고, 당시엔 무언가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느낀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생각이 든다. 뭔가 느껴야 된다는 생각이 앞서서, 느낀 척했을 뿐이지 않았나 하고.


I and the Village, 1911 © Marc Chagall


시간이 꽤 흘렀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샤갈, 달리뷔페 展> 이 열렸다. 마침 들를 여건이 되어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인 양 반가운 마음으로 방문하게 됐다. 다시 보면, 느껴지는 게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이 날은 마침 도슨트(Docent)가 없었고, 대신에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할 수 있었다. 내가 보는 그대로의, 선입견 없는 생 날 것의 느낌을 추구했지만, 다른 사람이 풀어내는 것도 들어보고 싶었다.


개장 시간 전에 도착했기에, 열리자마자 기다림 없이 바로 전시회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찬찬히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무 생각 없이 봤다. 다음으로 이건 무엇을 그린 그림이고, 어떤 색이며, 캔버스 속 공간이나 구도 등 뭐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려 했다. 내가 느낀 대로 보고 난 뒤에는 손에 들려있던 오디오 가이드와 전시회장 벽 곳곳에 있는 미술사조나 작품의 배경, 샤갈에 대한 이야길 읽어 내려갔다.


Les fiancés au cirque, 1982 © Marc Chagall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몇 작품을 보고 지나치다 어느 순간 문득, 이것들이 조금 다른 각도로 내게 다가왔다. 캔버스 안의 선이나 색, 구도 이런 형태적인 것보다는, 작가의 마음이 전해졌달까. 샤갈의 아내를 위한 사랑이나 서민들에 대한 마음, 애환 같은 것이 너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감정들은 끝나지 않고 전시회장 안을 향할수록 더해졌다. 동시에, 마음 한편에 설명하기 어려운 벅찬 기운이 가득 채워져 갔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게 느껴졌다. 샤갈은 뭔가 낭만적이고, 서정적이었다. 그의 삶은 꼭 그렇지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그것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샤갈이 너무 좋아졌다.


Cabinet Anthropomorphic, 1982 © 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Paravent, 1967 © Bernard Buffet


달리도, 뷔페도 종류는 달랐지만 샤갈과 같은 경험을 했다. 흥미롭기도 하고, 먹먹한 가슴 아픔도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작품을 본 뒤에 다시 전시회장 입구로 되돌아가 내가 봐 온 것을 한번 더 봤다. 이날의 관람은 신선한 충격을 전해줬다. 그림들은 분명 이미지였지만 한 편의 소설 같은, 마치 문학의 한 분야처럼 느껴졌다. 이 여운이 전시회장을 나와서도 한참을 갔다. 미술 작품에 대해 여러 감상법이나 접근법이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이 떠올랐다기보다는, 내 속에 감정을 일고 그걸 전해받았다는 게 오늘을 너무 좋게 만들었다. 나는 그림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왔다.






표현의 목적


우리는 무엇이든 표현을 하고 산다. 이것은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누군가에게 전할 목적으로 하는 행위다. 그 형태나 방법은 다양하다. 예컨대 안무가는 몸의 움직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선을 통해서, 가수는 목소리가 악기가 되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작가는 수없이 많은 단어들 중 전하고자 하는 바에 적합한 것을 선택하고 취합해서, 연인 사이에서는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좋은 재료를 구해 요리해줌으로써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전하게 된다. 이 외에도 말이나 여러 행위 등을 통해서 표현한다.


나는 평소 가요를 들을 때엔 전체적인 느낌을 두고 즐기려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가사가 먼저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생애 첫 고백을 했을 때였다. 잘 풀리지 않았다. 당시에 어떤 노래 하나를 접하게 됐는데, 그 노래가 정말 나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입장이나 상황들이 어찌도 그렇게나 나를 중심으로 가사를 써 내려간 것 같은지, 정말 신기했다. 그 노래는 곧 내가 되었다. 그 곡이 누군가에겐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분명 내게는 위로가 되었고 좋은 곡이었다.


노래는 타인에게서 비로소 완성된다 - Tejava


어떤 표현을 접하고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런 때를 맞이하면, 마음속 깊은 이해로 상대를 대할 수 있게 된다. 생각이나 행동의 변화를 이끌기도 한다. 표현이란, 나를 전달함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표현할 때, 그 목적에 충실한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했는가


'어떻게' 상대의 공감을 일으키고 변화를 유도할 것인지, '어떻게' 세련되게 전할는지 와 같은 부분들은 개인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더해지는 곁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가 아닌가. 이게 본질이다. 일단 생각이나 감정이 전달되어야 하는 게 급선무다. 하지만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에 설명하기 어렵거나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렵다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생각을 글로 옮긴 뒤에 그것을 돌아볼 때면, 원래 표현하고자 했던 바를 적절하게 하지 못한 것에서 실망을 할 때가 많다. 글을 읽어준 다른 사람들이나 시간이 지나서 내가 다시 펼쳤을 때에, 그 표현하지 못했던 원래의 생각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한 채, 모두가 그것으로 나를 판단할 거라 생각하니 가끔 겁이날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끼고 있는 걸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절한 단어와 조합을 찾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그런데 이런 답답함을 몇몇 사람들이 해소해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을 글로 쓴다는 것이, 정확히 표현한다는 것이 그렇게나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온전한 내 생각이나 느낌을 바르고 분명하게 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표현 하나하나에 너무 큰 해석이나 무게를 두지 않게 되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입으로 소리 내어 전하는 말에서 더욱 그렇다. 말은 잡기가 어렵다. 신속하다. 그래서 좀 더 신중하지 못한 채, 상황에 맞지 않은 단어의 선택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적재적소의 단어를 찾아 명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보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사람들이 하는 말들에 너무 일일이 반응하지 않게 된 것이다.





표현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누군가 무언가를 표현할 때에, 표현을 받은 사람들이 지엽적인 것을 꼬투리 삼는 걸 볼 때가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보고 이야기하는 꼴 말이다. 그걸 보고 있자면 가끔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물론 표현을 '전하려는' 입장에서는, 오해 소지가 없을 적확한 표현이 중요하다. 표현하기에 앞서 곁가지였던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표현을 '받는' 입장에서 보면은, 그걸 모든 자리에서 강요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가 유려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누군가와 소통이나 교감을 할 때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 표현을 '받는' 입장이라면, 곁가지보다 상대가 무얼 말하려 했는지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 매사를 정확한, 내 마음에 들어맞는 표현을 해주길 기다리는 건 고통스럽다.




표현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표현을 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생각이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맴도는 추상적인 이 생각이라는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으려면, 이 흐릿한 느낌이나 감정을 어떻게 정의 내릴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단어를 제대로, 그리고 많이 알고 있을수록 좋다는 거다. 단어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대상이나 관념 등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약속을 한 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한 단어를 보고, 비슷하거나 동일한 생각 또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단어를 제대로, 그리고 많이 아는 것은 더 풍부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데 절대 유리하다. 지나가는 감정, 생각을 잡는 데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도 좀 더 찾기 쉬워질 수 있다.


표현에 생각이 반영이 된다지만, 거꾸로 표현이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식의 표현을 많이 사용할수록 정말 그렇게 점점 생각하게 된다. 표현이라는 게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더 나은 표현을 찾으려고 했으면 좋겠다. 당장에는 아닐지 모르나, 어느 순간 남들이 느끼기에도, 스스로가 그 전과 비교해봐도 훨씬 달라진 나를 발견할 때가 올 것이다. 더 나은 표현을 선택하려는 것은 내가 그런 세상을 살아가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출발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이는 풍경이 변화한다. 그렇게, 삶을 더 사랑해 갈 방법을 나로부터 선택해갔으면 좋겠다.




Over the City, 1918 © Marc Chagall


따뜻한 애정에서부터 한 걸음 디뎌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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