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고 홀로서기
종종 따로 시간을 내어서 걷는다. 이어폰과 핸드폰, 시계 등 몸에 둘러진 그것들을 풀어헤치고, 될 수 있으면 가벼운 몸으로 나가려고 신경 쓴다. 되도록 가보지 않은 길로 걸으려는데, 친숙한 길이 아니다 보니 도중에 처음 보는 가게도 발견하고 담장이 예쁜 집도 눈에 새겨 넣게 된다. 길가에 피어있는 저 꽃이 무슨 이름으로 불렸을지도 떠올려보고, 귓가에 맴도는 짹짹거리는 새들의 외침에 몇 종류, 몇 마리가 그러는지 맞추려고도 해본다. 그렇게 일상으로부터 조금 떨어져 나와 주변에 관심을 하나씩 가져보다 보면, 그 속에서 나름의 재미가 있다.
걷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다. 게다가 노래나 내 정신을 뺏을만한 것들을 몸에서 때어내고 나와서인지,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한 나와 좀 더 마주하게 되는 느낌도 든다. 느끼는 그대로가 곧 나인 것처럼, 생각이나 감정들이 한층 가깝게 다가온다. 운동하는 것도 비슷하다. 유산소든 근력 운동이든 30 여분을 하다 보면, 근육이 떨리고 숨이 차오른다. 그 힘듦에서 잡념이 사라지고, 어디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확실히 느끼며, 어떤 생각과 마주하는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내 몸을 더 알아가게 된다.
걷기나 운동은 난잡했던 머릿속을 비워주고 마음의 안정을 주며, 조금 더 나다운, 내 원래 생각들과 바로 마주하는 것 같은 그것에서 마치 명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형태만 달랐지, 내 안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본연의 나와 마주하는 고요한 과정이라고 할까. 명상이 가만히 가부좌로 앉아서 참선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라고 본다. 이처럼 일종의 명상을 통해서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은, 비워냄으로써 가능했다. 내 주변을 가득 채웠던 것들을 털어냄으로써, 그 자리에 순수한 내 생각을 채워갈 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세상은 너무 재밌는 게 많아진 것 같다. TV나 PC, 스마트폰, 책, 신문 등 여러 매체들이 토해내는 엄청난 뉴스, 정보량과 그에 준하는 즐길 거리들이 셀 수가 없다. 자극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지 않나 싶다. 선택 장애라는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것들을 통해 접한, 어쩌면 몰라도 될 범람하는 정보들이 내가 무언가 하도록 자꾸 부추긴다. 내가 해볼 것,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그러면서 마음이 계속 외부로 향하게 된다.
어떤 분야든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많은 것은 유리하나, 그럴수록 선별하는 눈을 키우는 능력 역시 덩달아 중요해진다. 이런 눈 없이 무차별적으로 접하는 정보 속에서 그것들을 그저 멍하니 받아들이고만 있다면, 간혹 나를 뺏기는 것 같다. 진정한 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에 대한 고찰 없이 미디어가 알려주는 대로만 향하는 삶은 무언가 놓치고 가는 건 아닌지 싶다.
가끔은 뉴스나 정보의 다이어트를 해보면 어떨까.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그것들을 완전히 손 놓아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하루를 지내보면, 생각보다 별일이 안 생긴다는 걸 알 수 있다. 가정집에 TV 없이 지내는 분들이 이해가 된다.
비워냄으로써 채울 수 있다, 그 말은 곧 내 안을 메울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말과 뜻을 통한다. 마치 에너지 보존 법칙처럼, 하나가 채워지면 다른 하나가 비워지는 그런 상황 말이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와 같은 말들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에너지 보존 법칙: 외계에 접촉이 없을 때 고립계에서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다. 에너지는 그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곳으로 전달할 수 있을 뿐 생성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
한 곳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다른 곳에 소홀하게 된다. 너무도 당연하다. 이는 어디에나 적용시켜 볼 수 있다. 사람 간의 관계에서, 상대가 내게 짜증을 내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다룰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내게 배려에 대한 신경을 못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다 대고 나도 따라 버럭 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굳이 맞장구 쳐가며 내 에너지까지 쏟을 필요는 없으니까. 만약 내게 정신을 쏟을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머리가 아무리 복잡해도 명상할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거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많이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이해해보려면, 그 사람의 기질에 대한 데이터와 함께 상황과 그 상황을 어찌 받아들일까에 대한 분석, 그래서 어떤 대처를 했는지까지에 대한 전 과정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100% 정확히 책정할 수 없고, 단지 그 정도 느꼈을 것이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역지사지가 되어본다는 것은 꽤나 시간과 에너지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내가 신경 쓸 수 있는 수준은 한계가 있는데, 막상 그걸 쏟으려 해 보면 귀찮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생각해보면, 정말 제대로 남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것보다, 내 입장에서 적당한 선의 예단이 훨씬 쉽지않나.
배려나 사랑을 실천한다는 식의 이유로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있을 수 있다. 변호사가 변론을 위해 내 이야길 들어주는 것이라든지, 대표자가 어떤 위치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연인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등 상대방의 입장에서 좀 더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도움이 되어주려는 것은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해관계 속에서 우호적인 입장이고, 애초에 나를 위해 에너지를 쓸 준비가 된 사람들에 한정된다. 대게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이건 우리 모두가 어떤 관점으로도 같을 수 없는 서로의 타인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는데 쓸 수 있는 주의력의 한계선 때문이다. 다들 나만 생각하기도 바쁘다.
미국 Cornell 대학교 사회 심리학자 교수 Thomas Gilovich는 사람들의 착각에 대해 Spolight Effect라 명명한 심리학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내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학생에게 매닐로의 티셔츠를 입게 하고 4~6 명의 대학생들이 기다리고 있는 실험실에 들어가 잠시 머물게 했다. 그런 후에, 티셔츠를 입은 학생에게 '실험실에서 만났던 학생들 중에 몇 명이나 자신이 매닐로 티셔츠를 입었는지 알아차렸을까' 추측하게 했다. 실험실에 있던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그 학생이 무슨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지' 물었다. (중략)
이후의 실험에서는 학생들에게 코미디언인 제리 사인펠드의 사진이 찍힌 티셔츠를 입게 한 후 동일한 실험을 반복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8% 만이 그 학생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해냈지만, 티셔츠를 입었던 학생은 절반가량인 48% 가 자신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알아맞힐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인철, <프레임: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中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의 예의나 배려는 가지되, 그렇게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진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실제론 내게 관심도 없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까지, 그 사람들이 날 어찌 생각할까에 대해 내 에너지를 쏟는 건 내 손해다. 내게는 나를 위해 세상이 돌아가겠지만, 세상은 나를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
For paranoia about 'what other people think': remember that very few love, only some hate - and nearly everyone just doesn't care. - Alain de Botton, Twitter@alaindebotton 中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정보 다이어트를 해보자. 그렇게 내가 원하는 것, 나에 대한 이야길 내게 건네보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한다. 더불어, 우리는 사람들이 남에게 신경을 써 줄 여력이 그리 많은 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해 없이 나를 좀 더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기 시작하면, 섭섭함이나 질투와 같은 게 생겨나고 결국 내가 괴로워진다.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지, 진정 내가 마음 편할 길을 잘 찾았으면 좋겠다.
모두의 자립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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