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예술, 모임의 예술
2017년 겨울, 이소라의 콘서트를 처음 찾았다. 그 날은 이전 직장에서의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사는 방법이나 일하는 자아의 중심 같은 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많은 감정이 뒤섞인 채 퇴사를 얘기하고, 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마지막 출근을 지켰다.
그리고 그날 밤, 불 꺼진 공연장에 앉았다. 오랜 시간 좋아했지만, 콘서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내 옆에는 혼자 온듯한 남자 한 명이 있었다. 그 사람은 콘서트의 시작과 끝까지 아무 미동이 없었다. 박수도 치지 않고 환호성도 내지 않았지만, 무대에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이소라가 노래 중간에 나는 손뼉 소리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오랜 팬들은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집에 돌아와서 이런 메모를 남겼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자조적인 말. 사랑을 하는 것이 어떠한 힘의 근원일 텐데, 더 이상 자기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는 말. 대부분 기분이 좋지 않지만, 오늘은 생일이기도 해서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박수도 받는 것이, 가끔은 그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는 말. 그런 말들의 끝에 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낮의 하늘은 잘 보지 않고, 밤의 하늘을 종종 본다며, 그래서 별에 관련된 노래가 많다고 했다. 별을 보며 위로를 받고, 작은 소원을 빌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보다는 위를 쳐다보며 삽니다. 무언가 이뤄지길, 더 나아지길 기대하고, 소망하며 삽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니까요.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또 없으니까요.">
그 날의 숨소리와 음색은 이상한 울렁임으로 남았다.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선명한 말과 노래를 그 후로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보다는 위를 쳐다보며 사는 삶을 기억하려 했다.
그리고 작년, 다시 3년 만에 콘서트를 예매했다. 달력을 넘기다가 12월에 적힌 하루를 보면 마음이 설렜다. 그러다 일정이 올해 3월로 미뤄졌다. 3월에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2주 전 취소 문자를 받았다.
“대중음악 콘서트는 다른 장르의 뮤지컬이나 클래식 음악과 달리 ‘모임, 행사’로 분류돼 있어” 진행이 어렵게 되었다는 설명이 길게 적혀있었다.
작년 말부터 친구들의 피드에서 클래식 콘서트에 다녀온 소식을 종종 받아볼 수 있었다. '한 줄기 빛'이라는 표현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 하루를 가질 수 있어서, 이 하루 중 이 몇 시간을 소유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뮤지컬, 클래식 공연과는 달리 모임, 행사로 구분되어 공연을 할 수 없는 예술가는 어떤 기분일까.
예술로 구분되는 예술과 모임으로 구분되는 예술은, 그 기준과 정의는 누가 정하는 걸까.
모두가 힘든 한 해였지만, 유독 힘든 사람들이 있었다. 유독 거절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유독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았다.
올해는 다시 연말의 이소라를 기다려본다. 일 년에 한 번 그 목소리와 대면하는 것으로 어떤 힘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건 분명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