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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Jan 19. 2021

흑임자와 분이 씨

며칠 전, 한밤에 술과 디저트가 땡겨 마트를 털러 나섰다. 세븐일레븐에서 만 오천 원, 롯데마트에서 이만 천 원을 쓰고 마지막 들린 씨유에서 호로요이 네 캔과 비비빅 투쁠원을 건졌다. 카운터에는 뽀글거리는 파마에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께서 앉아계셨다. 비비빅의 바코드를 찍던 할머니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이거 흑임자 나왔는데, 흑임자. 그게 맛있어요. 기왕이면 하나는 그걸로 해요.”


할머니에 약한 선호가 맘에 없던 흑임자로 바꾸러 간 사이에 할머니는 말을 보탰다. 아니 거기 찹쌀떡이 들어있더라고. 요맨한데 많아. 아주 맛있어.

비비빅을 흑임자로 바꿔오는 동안 할머니는 맥주캔에 붙은 바코드를 찾느라 한참 시간을 보냈다. 맥주 네 캔의 바코드를 찍기 좋게 찾아드리고, 투쁠원을 잘못 찍어 모든 계산을 다시 하고 나오려니 둘 모두 마음이 찹쌀떡처럼 녹아내렸다.

“아, 할머니 보고 싶다.”

저번 달은 선호 외할머니의 1주년 기일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할머니가 외할머니를 닮지는 않았지만, 어떤 할머니들은 외할머니와 겹쳐 보여 그리움이 동한다. 불쑥 말을 거는 할머니. 겉절이도 먹어보라는 할머니. 찹쌀떡이 좋은 할머니. 입술을 모으고 웃는 할머니.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자주 본다. 나는 아주 또렷한 롤모델을 가지고 있다.

좋다는 말만큼 싫다는 말을 자주 하는 분이 씨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깔깔 웃었다. 손주 하는 얘기에 “그건 니 생각이고.” 받아치는 분이 씨가 유쾌했다. 하루에 세 번 옷을 갈아입으며 지팡이를 거부하는 분이 씨가 당당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분이 씨 집 거실에서 다리를 쭉쭉 벌리고 앉아 누가 더 유연한지 대결을 펼쳤다. 승자는 늘 분이 씨였다. 새모이같은 밥을 나눠먹고 나란히 누워 꿀처럼 단 낮잠을 자고 나면 거실 창으로 붉게 노을이 졌다. 조용히 화분을 들여다보는 분이 씨. 밥보다 콜라가 맛있는 분이 씨.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린 알전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분이 씨. 큰 이모님이 사 오신 산타 인형은 마음에 드는 분이 씨.


분이 씨를 떠나보낸 후, 불쑥 분이 씨 의견이 궁금할 때가 있다. 선호랑 내가 사업을 시작했을 때, 분이 씨는 어떤 말을 했을까. 볼링장은 어떻게 평했을까. 분이 씨는 호불호가 강한 사람인데, 이번에는 마음에 들어했을까. 처음 하는 일이 어려워서 울면 뭐라고 답했을까. 바보,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해줬을까. 반짝이는 지혜를 나눠줬을까. 일제 시대를 겪으며 나이를 먹고, 육이오 전쟁 때 가족을 잃은 사람의 눈에 지금 이 시대는 어떻게 읽힐까. 그 옛날 피난 이야기처럼 한 조각 믿기지 않는 현실로 기억될까. 분이 씨가 없는 곳에서 분이 씨의 답변을 상상해본다. 내 좁은 머리에서는 분이 씨만큼 재치 있는 답이 나오지 않아 상상은 늘 재미없게 끝이 난다. 내가 작성한 예상 답변을 보면 분이 씨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웃을 것이다. "그건 니 생각이고."


달력에 실린 사진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길가에 파는 오천 원짜리 강아지 인형을 귀여워하는 사람. 전쟁 시절부터 유럽 여행까지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 사람. 손자의 세계만큼 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 노인이라는 단어로 규정되지 않는 사람. 잠깐 만난 정분이 씨와 호시절을 보냈다. 내 90살 친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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