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지는 것
오늘은 튤립 구근 두 개가 소포로 도착했다. 물 담은 유리병 위에 구근을 올려두면 곧 뿌리를 내리고 싹도 틔울 거라는 엽서와 함께였다. 아기 주먹만 한 구근 속에 뿌리가 있고, 싹이 있고, 선명한 꽃 한 송이가 들어있다니, 도시 사람은 당연한 이치에 새삼 놀란다. 단단하고 하얀 그것을 가만가만 만져봤다.
갑자기 무직자가 된 3주 차의 첫날은 낮잠을 3시간 자고, 점심과 저녁을 집에서 차려먹는 것으로 보냈다. 9시가 되기 전에 따릉이를 타고 20분 달려 케이크도 두 개 포장해 왔다. 달리고 걸으며 말을 주고받고, 번갈아 고개를 끄덕였다.
닫으라 하면 닫고, 열라 하면 여는 일을 하게 되면서 세상이 자꾸만 다른 게 보인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만 남겨놓은 세상에서는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질까. 구근 뿌리에 닿은 물은, 그래서 싹을 틔우는 물은, 꽃의 색깔을 정하는 물은, 누가 정하는 걸까. 무엇이 그 물이 될 수 있을까.
음악을 지우고, 공간을 지우고, 커피를 지우고, 그래도 살아지는 게 인간일까. 밥과 직장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일상일까. 밥벌이의 문제를 떠나, 살면서 진짜 필요한 게 뭘까. 닫고 지워지는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뭘까. 이미 모든 게 넘쳐나는 세상에서, 넘쳐나니까 문제가 생기고, 넘쳐나니까 경쟁하고, 넘쳐나니까 제한해야 하는 세상에서, 내가 또 하나 만들고 싶은 건 뭘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소포로 꽃을 실어 나르는 마음을 생각한다. 작디작은 봄이 꾹꾹 눌러 담겨있는 단단한 마음.
남을 여, 틈 가.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는 작은 사치라 생각했던 그 단어가 뿌리에 사무친다. 잃고 나서야 보이는 일상의 작은 틈. 한치의 낭비 없이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