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lding in Public
올해 여름, 사업을 정리하고 3개월쯤 쉬었을 때 이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삐죽 싹을 틔웠다. 아직은 뿌리가 약한 그 식물을 마음에 소중히 품고, 오래전부터 합류를 제안했던 대표에게 출근을 약속했다. 전날 밤 미리 골라둔 옷을 떨리는 마음 위에 걸쳐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한 출근 첫날. 되도록 많이 웃으려는 나와 달리 어쩐지 쌩한 분위기의 전체 미팅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는데, 경영진 중 한 명에게서 앞으로의 업무 분장에 대한 회의 요청이 왔다. 출근 첫날이니까 가벼운 대화가 오가겠거니 생각하고 간 자리에서, 어떻게 실력을 증명할 건지 검증 방법을 세워오라는 요구와 함께 솔직히 내가 맡은 포지션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출근한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서로의 입장차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몇 달을 보내면서 '환대'라는 키워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제현주 님의 책 <일하는 마음>에는 '롤링다이스'라는 협동조합의 이야기가 나온다. '롤링다이스'는 책 모임을 함께하던 동료들이 협동조합이라는 형태로 모여, 전자책을 만들고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등 유연하고 자율적인 협업을 실험하는 공동체이다. 롤링다이스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장소에서 원하는 만큼 일하고, 함께 번 만큼을 나누어 가진다고 했다. 이 책에서 롤링다이스의 조합원 중 한 명인 이소연 님의 글이 인용된다.
(롤링다이스에서) 서로를 반기는 데 다른 조건은 없었다. 오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와서 만나면 반가웠다. 나한테는 이런 곳이 예전엔 없었다. 나는 여기에 완전히 빈손으로 왔는데, 환대를 받았다. 그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후에 나는 직장인이 되었다가 지금은 다시 빈손이 된 참인데 내 상태의 변화가 이들로부터 환대받을 권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안다.
'환대받을 권리'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몇 달 전에 봤던 공연이 떠올랐다. '고잉홈 프로젝트'의 공연 마지막 날이었다. 고잉홈 프로젝트는 손열음이 2018년 평창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기획하며, 해외에 흩어져있는 한국인 아티스트를 모았던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평창에서 만난 연주자들이 연주자 중심의 프로젝트 악단을 창단했다. 이들은 지휘자 없이 '봄의 제전'을 연주하고, 연주자 전원이 객석을 향해 인사하며 연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악단의 주인공이 된다고 했다.
나는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0에 수렴해서 어느 음악가가 유명해지면 영상을 찾아보며 시류에 편승할 뿐 클래식을 제대로 즐겨본 적은 거의 없다. 문화 시민이라면 알긴 알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서툰 이론만을 얼기설기 쌓아왔다. 그런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날 76명의 교향악단이 내는 소리를 눈앞에서 목격하는 건 다른 차원의 놀라움이었다. 교향곡의 한 음 한 음이 사람이 내는 소리, 그러니까 어떤 사람과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음과 음을 맞춰 소리를 쌓아가는 행위라는 걸 눈으로 목격하고 나서야 그 곡의 구조가 처음으로 이해됐다.
집중한 동작과 오가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우아한 공기가 공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주 작은 소리부터 천장을 울리는 큰 소리까지 76명의 데시벨을 똑같이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가늠해 보았다. 그 모든 행위가 아름다워서 눈물이 핑 돌고, 의외의 타이밍에 놀란 눈물이 크게 맺혀 떨어졌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말을 잃었다. 76명의 악단을 마주하며 눈시울이 시큰해진 이유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76명의 동료를 가진 집단과 그 집단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이 부러웠다. 마지막 연주 후, 포옹을 하며 서로를 아쉬워하는 순간이 내 것이 되기를 탐하고 있었다.
롤링다이스 이소연 님의 글을 읽으며, 공연장을 가득 채웠던 공기의 이름이 서로를 '환대하는 공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공기를 눈으로 목격했을 때, 환대하는 동료와 환경에 대한 갈증이 눈물이 날만큼 커졌다. 당시의 나는 환대의 공기를 찾을 수 없는 직장에서 틀어진 마음을 얼르고, 자존심을 긁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합을 맞추느라 진이 빠진 상태였다. 처음부터 서로가 서로를 환대해주는 곳에서 만나, 공동의 목적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내 존재의 이유를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서로에 대한 인정이 전제되는 관계에서는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환대하는 환경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만 고민하며 몇 달을 헤매고 있었는데, 갭이어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환대'의 대상이 점차 다르게 이해되었다. 어쩌면 세상은, 특히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나를 환대해 주었다. 믿어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그런데 밖에서 오는 그 모든 환대에도 불구하고, 나를 가장 환대해 주지 않는 사람은 나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는 선호랑 대화 중에 이런 말이 입에서 나왔다. "내가 세상에 내세울 게 없다고 느끼니까, 자꾸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내 감정을 계속 묵인했던 거 같아. 나를 채찍질하기만 하면서, 그냥 참아, 지금은 힘들어할 때 아니야, 그래서 이거 안 할 거야? 해야 하잖아, 이렇게 늘 '해야 하니까' 해왔던 거 같아. '하고 싶어서' 했던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아."
빈 손이 되었을 때 내 가치를 가장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이 나였기에, 나는 손에 든 것의 무게만큼만 나에게 환대받을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세상을 흑과 백, 규칙을 따르면 생존, 아니면 낙오, 모든 것은 자기 책임'이라고 믿으며 가장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넘어진 나를 기다려주는 대신, 내 감정을 묵인하고 가능성을 믿어주지 않았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선행되지 않았기에 그 뒤의 환경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환대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빈 손인 나에게 환대받을 권리를 쥐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바라던 환대하는 환경, 환대하는 동료를 만날 수 없었던 거라고 이제는 이해한다.
그래서 조금 우스운 말이지만, 나는 나와 화해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화해라는 단어 외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 30년도 더 전에 유행했던 '나를 찾는 여행'이라는 콘셉트가 여전히 유효한 것에 놀란다. 불교의 오래된 경전처럼, 나를 붙잡고 미안해, 사랑해, 뻔한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정말로 우습게도 이 사과와 사랑은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러니까 나와 나의 관계 말이다.
지금 갭이어를 가지고 있는 다른 친구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예전에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 씨가 쓴 <2인조>라는 책을 선물 받았거든요. 그런데 제목만 보고 그 책이 싫어서 안 읽었어요. 나는 지금 동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2인조가 아닌데 하면서, 이건 나한테 해당되는 책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얼마 전에 그냥 심심해서 그 책을 펼쳐봤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말하는 '2인조'는 나랑 나의 관계를 말하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놀랐고, 되게 위안이 됐어요. 맞아, 나는 나랑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지 하고요. 나랑 내 마음, 이렇게 2인조인데, 다른 한쪽의 나를 얼마나 챙기지 못했는지 실감하고 있어요."
이석원의 <2인조>는 '우리는 누구나 날 때부터 2인조다'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그 부제는 다음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날 때부터 2인조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잘 지내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내가 묵인했던 제1의 동료인 나를 다시 바라본다. 세상을 헤쳐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동료인 나에게서 얻는다. 마음과 몸이 공생하며 2인 3각의 경기를 뛴다. 밖의 상황을 말하기 전에 나와 화해하고, 내가 먼저 나를 환대한다. 단단한 나로 살기 위한, 남을 환대할 수 있기 위한, 환대하는 환경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선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