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윤과 협업자들의 전시 <가든.로컬 > 보안1942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찾은 통의동. 보안1942의 1층에 자리 잡은 33카페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노란 낙엽이 내려다 보이는 큰 창 앞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 최태윤 작가와 협업자들이 보안스테이 41호에 조성한 <가든.로컬> 전시다.
뉴욕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이자 교육가, 활동가인 태윤 님과는 재미있는 관계이다. 우리의 만남은 글에서 글, 전시에서 전시로 이어진다. 상냥함(gentleness)과 정의(justice), 자신을 돌보는 방법(self-care)과 포용(magnanimity), 무엇보다 나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를 사랑하는 행위(love)에 대해 말하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또 어떤 키워드를 던져줄까? <가든. 로컬>이라는 제목에서 힌트를 유추하며 전시장을 찾았다.
‘생명을 다한 컴퓨터는 어디로 갈까?’라는 의문에서 가든.로컬은 출발한다.
현재 이 지구에는 20억 개의 컴퓨터가 있다고 추측한다. 정확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2021년에 판매된 컴퓨터가 3억 개가 넘는 기록을 생각하면 20억 개의 컴퓨터가 납득된다. 우리가 아마존에서 쉽게 주문하는 물건들은 짧은 시간 후 쓰레기가 되어 다시 ‘아마존’으로 돌아간다. 전자 쓰레기는 환경파괴의 큰 요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컴퓨터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더 많은 질문이 생겼다.
사람처럼 살고 죽는 컴퓨터의 생태를 자연으로 치환하면 우리는 어떤 자연을 보게 될까. 가든.로컬은 질문한다. '컴퓨터는 시간의 흐름을 담는다. 시간 안에서 유는 다시 무가 된다.' 흙의 물성을 가진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연결된 우리. 만약에 인터넷이 정원이라면 그 안에는 어떤 네트워크가 만들어질까. 버섯-넷 MUSH-NET? 지의류-넷 LICHEN-NET? 이끼-넷 MOSS-NET?
전시의 참여자 리스트를 본다. 웹 개발과 하드웨어 디자인 설계, 서버 엔지니어, 인터랙티브 웹 모션을 담당하는 협업자들 사이에 최태윤 작가는 ‘정원사’의 역할을 맡았다. 서버와 하드웨어 사이에 정원사는 어떤 가든을 조성했을까. 소프트웨어를 식물로, 하드웨어를 흙으로, 데이터를 생물로 정의 내린 보안여관의 작은 방 안에서 34개의 컴퓨터가 분산된 동시에 연결된 정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든.로컬에서 나는 하나의 온라인 객체로 참여한다. 이끼, 버섯, 지의류 중에 나의 역할을 선택하는 문항에서 잠시 손이 멈칫거린다. 나는 이끼 같은 사람일까? 버섯 같은 사람일까? 지의류일까?
국어사전은 이끼를 '잎과 줄기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고 관다발이 없는 하등 식물'로 정의한다. 고목이나 바위, 습지에서 자란다.
버섯은 '자균류와 자낭균류의 고등 균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로 그늘진 땅이나 썩은 나무에서 자라며, 홀씨로 번식한다. 송이처럼 독이 없는 것은 식용하나 독이 있는 것도 많다.' 나는 식용 가능한가? 독이 있는가?
지의류(地衣類, Lichen)는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로 설명된다. '녹조류, 혹은 남조류가 균류와 공생하는 복합 유기체로, 균류는 조류를 싸서 보호하고 수분을 공급하며, 조류는 동화 작용을 하여 양분을 균류에 공급한다. 나무껍질이나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데 열대, 온대, 남북극으로부터 고산 지대까지 널리 분포한다.' 나는 북국의 툰드라, 유독한 화산암 더미의 극한 환경에서 자라는 류인가? 열대 우림에 뻗어있는 공생체인가?
마음이 이끼를 고르는 것을 보고 나는 이끼 같은 사람이구나, 뒤늦게 이해한다. 나는 잎과 줄기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다. 관다발 조직이 없어 높이 자라지는 못하지만 온 몸으로 물을 흡수한다.
느린 파동으로 움직이는 가든 안에서 내 이름을 단 이끼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잎새'라는 이름이 버섯 위에 앉았다가, 다른 이끼에 부딪혔다가, 지의류의 무리에 감싸인다. 어떤 제약이나 규칙도 없다. 강제하는 힘도 없다. 그렇게 둥둥 떠다니는, 흩어지는, 자유롭게 분리되어 있는, 객체로서의 나를 지켜본다. 단 한 개의 뾰족한 감정도 없이 정원 안에서 평화롭다. 풀밭 위, 낮의 볕에 녹아내린 개가 된다. 마음이 명상한다.
보안1942의 4층, 41호 방은 실제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보안여관은 1942년부터 2005년까지 60년에 걸쳐 서울의 몸을 담았다. 옛날 건물 그대로 이제는 갤러리로 개방된 보안여관과 새롭게 지어진 보안 1942 건물이 통로로 연결된다. 2022년 현재도 사람이 씻고 자고 머물다 가는 보안스테이의 침대와 집기를 모두 들어낸 곳에, 온라인 가든과 이끼들이 사람의 몸을 대신해 공간을 채운다. 통창 밖으로는 경복궁의 안쪽 뜰이 내려다 보였다. 인터넷 가든과 현실 속 가든이 공존하는 장면. 각각의 역할이 조용히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숨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인스타그램에 게시물 하나를 올린 날이었다. 어떤 오류인지 피드에 노출이 거의 되지 않는 걸 확인했다. 하필이면 사람을 모으는 모집 글이었기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평소보다 더딘 반응에 답답함이 느껴졌고,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는 내가 싫었다. 나는 이 플랫폼에 자생하고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이 관계가 얼마나 철저히 종속적이었는지, 관계의 상하가 갑자기 선명해졌다. 알고리즘에 의해 제외되거나 선택받지 못하면 아무리 진실된 말을 담고 있어도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이제는 온라인 세상에서의 나도 또렷한 자아를 가진다. 그러면 그 살아있는 자아의 목소리가 플랫폼에 의해 상실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눈에 보인 뒤에는 플랫폼 자체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서버와 데이터로 구성된 온라인 세상을 어떻게 현실의 나와 일치시킬 수 있을까? 갭을 줄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일치된 자아로 플랫폼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자생하는 객체가 될 수 있을까?
가든.로컬은 분산된 온라인 정원을 제안한다. 각각의 서버를 가진 컴퓨터 정원에서 내 이름을 단 이끼가 목적지 없이 유영한다. 강압이 없는 그 느린 움직임을 보는 것으로, 몇 개의 거대 플랫폼으로 정의 내려지지 않는, 나 개인의 온라인 세상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나는 데이터와 데이터로 연결된다. 온라인으로 사람과 이어지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다시 오프라인의 내가 큰 걸음을 내딛는다. 사진과 데이터로 설명하고 정리된 내가 현실의 움직이는 나와 같은 사람이길 바란다.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정성껏 쓰고 생각한다. 온몸으로 물을 흡수하는 이끼의 목소리를 상상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목소리가 공존하며 공명하는 순간을 그리워한다.
경희루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방에서 우리는 각자의 정원에 입장하는 경험을 한다. 우리 개인의 정원은 분산된 형태로 공존하고 있다. 나와 다르게 움직이는 당신을, 당신과 종의 기원이 다른 나를, 그래서 끝내 연결되지 못하는 우리를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정원에 둔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 서로를 이해한다면. 무에서 유로, 다시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일부가 된다면. 어쩌면 이토록 다른 우리에게도 공존의 희망이 있는 게 아닐까? 가든.로컬에서 나와 내가 자연의 일부로 화해한다. 데이터의 끝에 닿아있는 또 다른 타인과 화해한다. 하나의 객체로 자립하며 객체와 공존하는 방식을 고민한다. 이끼와 버섯, 지의류와 흙 사이에서 느리고 깊게 숨 쉬는 시간이었다.
*전시 정보*
가든.로컬
최태윤과 협업자들
보안1942 4층 - 보안스테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33
11월 22일 - 12월 4일
오후 12시-6시
최태윤: 정원사
추성아: 전시 기획
신재민: 프로젝트 매니저
박소선: 웹 개발 및 프로덕트 관리
장승훈: 서버 엔지니어
고윤서: 인터랙티브 웹/모션
세자르 모칸: 웹 개발
김범준: 공간/비주얼 디자인
이동훈:하드웨어/펌웨어 디자인/설계/개발
서유리: 하드웨어 설치 어시스턴트
가수연: 영상
y2k92: 음악
본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2022년 예술과기술융합지원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