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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Jul 15. 2020

How to love someone far away.

You share this pocket of dirt.

삼십 대 중반에서 과거를 돌아보면 그 모든 서툰 과오가 겨우 수습된 것에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온다. 이제 더 이상 20대의 나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저절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거의 100프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순간에서 예전보다 지금이 더 좋다.


그런데 딱 하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월등히 이기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간격연애'를 언급하며, 지금의 인연을 풀어놓을 때다. 2015년도에 쓴 책이 아직도 새 인연을 연결시켜 주다니. 적어도 나는 간격연애를 쓴 5년 전 나에게 단단히 빚을 지고 있다.


얼마 전, 선호에게 불쑥 DM이 왔다. 전시를 열었으니, 서울에 계시면 놀러 오시라는 연락이었다. 처음 보는 이름은 '간격연애'의 독자라 본인을 소개했다. 아직도 간격연애의 약발이 살아있다니! 마침 둘 다 서울 일정이 겹쳤던 터라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를 찾았다. 전시장 앞까지 택시를 타고 내렸는데, 맞은편에 오던 사람이 어! 하고 우리를 알아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 제가 '그 사람'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지금 잠시 전시장을 떠나 있어야 하는데, 2층에 선물을 맡겨놨으니 찾아가시라고 했다. 인사도 하기 전에 먼저 알아보셔서, 우리는 '헤헤 이런 게 연예인의 기분일까..?' 하고 일반인 주제에 조금 들떴다. 나는 앞머리가 엉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예전에 이 동네에 놀러 왔다가, 들어가 본 적 있는 전시장이었다. 전시장 안에는 사랑과 포용과 화해와 이해의 말들이 가득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둥둥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선호는 어쩌면 자기도 말이 통하는 남자 친구가 생길지 모르겠다고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이제는 절을 해야 하는 세상이다. 공들여 쌓은 관계에서도 쉽지 않은 '통하는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해 전시장을 감상하는 내내 현실감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서 예의 '그 선물'을 찾으러 머뭇머뭇했다. 작은 종이상자에 스마일 마크와 함께 '선호/잎새님께' 쓰여있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처음 보는 그 얼굴의 이름은 '태윤'. 1층으로 내려와 열어본 상자에는 4장의 작품이 들어있었다. HOW TO LOVE SOMEONE FAR AWAY. 내가 뚝뚝 울고, 옆에서 선호도 울었다.


부재중이신 작가님께 다시 연락을 해보고, 그래서 우리는 만났다. 간격연애가 이어준 새로운 사람. 뉴욕에 사는 태윤님은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에 들어오시는데, 홍대 유어마인드에서 우연히 간격연애를 집어 들었다고 하셨다. 책 이름과 표지만 보고는 그 책을 사서 다시 뉴욕으로 가셨다고. 거기서 읽으면서, 이 사람들 뭐야? 왜 이렇게 귀여워? (내가 멋대로 쓴 게 아니라 태윤님이 실제 하신 말이다) 하며 놀랐고, 장거리 연애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야, 이걸 봐. 너도 아름다운 연애를 할 수 있어." 하며 위로차 건네면, 다들 꺼져, 닥쳐, 좆까라고 했단다. (장거리 연애가 이렇게 위험하다)


그리고 다시 몇 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셨고, 들어와서 불현듯 간격연애 생각이 나셨단다. '어, 그 사람들! 아직도 사귀나?' 싶어 찾아봤더니, 사귀다 못해 결혼을 해 있었고, 선호와 내가 쓰는 블로그를 그때 처음 보셨다고 했다. 그리고 간격연애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태윤선호잎새는 경복궁 근처에서 만나 종이가 아닌 얼굴을 마주한다. 이 모든 긴 얘기를 전해 듣는다.


얼마 전, 서울에서 만난 친구가 '쓰고 싶은 글'과 '써야 하는 글'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는 '써야 하는 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에세이는 작가 자신의 만족이 커서, 글쓰기의 세계가 그 선에서 그치는 게 싫다고 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친구가 요즘 쓰는 글을 보면, 생각이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넘어간 듯하다. 나 역시 10년이 넘게 일기를 쓰면서 늘 같은 고민을 했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말에 카페에 갔다' 이 한마디를 길게 풀어쓰는 것에 무슨 의의가 있을까? '내가 지치고 아픕니다' 이 한마디를 상세히 설명해서 어떤 위로를 얻을까? 아주 작고 사소한 글 한토막에도 쉽게 비웃음을 듣는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이게 뭐라고 쓰냐, 는 내가 나를 비웃는 소리.


그런데 그 비웃음을 못 본 체하다 보면, 그래도 계속 쓰다 보면, 가끔 보상처럼 근사한 우연이 나타난다. 경험의 '공유'가 경험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내가 연애한 얘기를 썼는데, 남이 위로를 받았다 한다. 내가 쓴 엄마 얘기에 엄마가 운다. 내가 쓴 선호 얘기에 선호가 웃는다. 내가 아픈 얘기에 아픈 사람이 말을 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읽는다.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쓴다. 그러면 아픔이 아픔으로만 남아있지 않다. 더러운 경험이 여전히 더러운 채로 남아있지 않다. 패배가 패배로 남아있지 않다. 내가 고른 단어가 나를 키운다. 내가 쓴 경험이 다른 경험을 불러온다.


그래서 5년 전 내가 다시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줬다. 비웃는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어설픈 나를 추스려 종이에 꾹꾹 눌러 담은 말들이 여전히 꼬물꼬물 살아서 작동한다. 내가 수습해준 숱한 과오들이 무색하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영영 갚지 못할 빚을 지운다.


세상엔 근사한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럼 또 어떤 사소한 말로 새 친구를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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