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와 자라목이 없는 세상
엄마가 오늘 선호랑 있는 대화방에 "두 분 작가님들 제 글을 봐주세요. 수정 부분 있는지." 말했다. 와, 무슨 글을 썼어 엄마? 얼른 보여줘! 엄마가 쓴 건 학교에서 숙제로 내 준 입학소감문. 두 쪽에 빼곡히 적힌 글을 보고 나는 회사에서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엄마 왜 붕대 얘기는 안 했어, 하고 물으니, 그 이야기는 너한테도 못 했지 부끄러워서, 한다.
내가 학교를 다닐 수 있다니 눈물이 났다
책가방을 메고 교실에 들어서니 선생님께서 유애란 써져있는 명찰을 주셨다
또 눈물이 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버스 차창 밖 풍경이 달라보인다
A B C 전혀 몰랐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감사하다 그리고 행복하다
밥을 먹고 배부름을 느끼지만 늘상 텅텅 비워져 있는 머리 속에 배부름을 채우련다
일성 중학교 졸업장으로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련다
아이들이 학교 다닐 때 가정통신문을 받아 오면
부모 학력란에 그냥 고졸이라고 써 말하는 내 목소리
내 모가지는 자라목이 되고 했다
어느 날 내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부조금을 정리하는데
다녀간 사람들 이름 속에 한문으로 쓰여져 있는 이름을 보고 다시 한 번 억장이 무너졌다
딸아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회사에 취직을 했단다
자식을 만나러 가는 길 얼마나 설레는 길이냐
아이가 근무하는 직장이 부산항에서 후쿠오카를 오가는 항만 회사라서
엄마 온다고 배 안에 객실도 특등실을 예약해주었다
승선표 확인서를 쓰는데 한문과 영어로 쓰란다
내 머릿 속은 하얀 백지가 되었다
그래 카운터에 부탁을 하니 그것 승객이 써야 한단다
망연자실하고 서 있는데 약국이 눈에 들어왔다
약국에 들어가 붕대를 사서 화장실 가서 손에 붕대를 감고 다시 카운터로 갔다
손을 다쳐서 글씨를 쓸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부탁을 해 승선을 했다
그리하여 승선을 했는데 일본입국서를 쓰라는 용지를 또...
입국서 안에 외국에서 무기를 소지하신 적이 있습니까? 란에 예스 노가 있었는데
예스라고 표기해버려 다른 사람들은 입국을 다 했는데 난 세관경찰서로 갔다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제는 한문을 열심히 배워서 그때 읽지 못했던 이름을 한문으로 당당히 써서 가리라
내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 홀로 도전해보리라
학교에서 지구과학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는 '내가 저런 곳에 살고 있는 거구나' 싶어 마음이 벅찼다고 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영어, 한문, 컴퓨터. 엄마가 배우는 과목은 열 손가락을 가득 채우는 9개. 금요일에는 쑥 캐러 다녀오고, 토요일에는 친구들이랑 유람선을 타느라 며칠 깜빡 정신을 놓으면 어느새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며, 없는 제사라도 만들어서 숙제 못 한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싶단다. 그래도 배워보니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다고.
남편 없이 애 둘을 키우느라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신물을 삼키며 살아왔을까. 어째 살았누, 하니 그래도 이리 결과가 있잖아, 한다. "잘 자라 잘 사는 너희들이 있고 건강해져서 학교 다니는 내가 있고."
이제는 붕대도 자라목도 없는 세상에서 엄마가 A B C 한다. 사랑 애, 난초 란, 이제는 아는 엄마 이름을 한 획 한 획 공책 가득 적는다. 엄마 하루가 한 줄 시 같다. 입학소감문은 아무 데도 고칠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