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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잎새 Nov 10. 2022

주어 있는 추모

내가 자연사가 아닌 죽음을 맞이했을 , 나는  죽음이 어떻게 다뤄지기 바랄지 생각해 본다. 무엇보다 남편과 가족이  죽음을 ‘마음에 묻는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얘기하고 안에 티끌이 남지 않을 때까지 얘기해서, 미련 없이  죽음이 땅에 묻히기를 바랄 것이다. 나의 죽음이 자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났다면, 그것이 ‘현상 아닌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되어 풀어지고 연구되고 앞뒤가 밝혀지는 것으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납득할  있는 종결이 주어지길 바랄 것이다. 그래서  년이 지나고도 차마  이름을  밖에 꺼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잎새 웃겼지, 하고 웃을  있기를 바랄 것이다. 애도의 명목으로 누구도 침묵하지 않는, 주어가 있는 추모를 원할 것이다.  이름과 사진이 붙은 곳에서, 사건이 사건으로 종결된 뒤에, 가족이 원하는 방식의 명확한 추모, 죽음과 일상이 서로를 끌어안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있는 추모를 바랄 것이다.


오은영 박사가 말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지겹다고 느낄 정도로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해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얘기해야 해요. 그리고 그걸 주변 사람들이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냐면, 계속 계속 들어줘야 해요. 그런데 너무 많이 얘기해서 더 못 할 것 같으면, 듣는 걸 업으로 하는 저 같은 사람한테라도 말해야 해요.”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서, 사건이 해결되지 않아서, 모두가 잊으라고만 해서, 자식을 잃었을 뿐인데 의도를 품은 사람이 되어서, 아직 땅에 묻히지 않아서, 마음에 살아있어서, 거듭 이야기하는 사람들, 외치는 사람들, 일상을 살아냈을 뿐인데 투쟁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 말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듣기 원한다. 동료 시민인 그들의 목소리가 닿아야 할 곳에 닿아야, 언젠가 내 것이 될지 모르는 죽음도 명징하게 밝혀질 거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를 믿으며 사회 안에 살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의 무게를 신뢰할 수 있을 때, 오늘을 살아내는 일에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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