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둔 귀 : 미완의 온기

by 이표


“아이고, 나는 손이 안 닿네.”



여느 날처럼 이어폰을 끼고 버스를 타고 있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저상 버스. 그 안의 몇몇 자리는 유난히 위로 솟아 있다. 그중 하나에 앉은 할머니가 버스 천장의 에어컨을 향해 손을 뻗고 계셨다. 내가 이어폰 너머 소리를 인식하기까지 이미 몇 번을 엉덩이를 들썩여 보셨나 보다. 세월이 담긴 얼굴에 민망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계셨다.


“제가 해드릴게요, 잠시만요.”

나는 오른쪽 이어폰을 빼고 어정쩡하게 선 자세로 에어컨 송풍구 방향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 정도면 충분한지 몇 번을 물어가며 원하는 대로 바꾸었다. 서 계신 분들은 더울 테니까 이렇게만 할게요. 양해를 구하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끄덕였다.


그때, 갑자기 내 옆자리 앉은 다른 할머니가 말을 꺼내셨다.

“우리는 너무 추워. 그쵸?”

“그러게요.”


그러자 동년배로 보이는 분들의 이야기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은 에어컨 바람이 시원할 텐데, 할머니가 되면 다 그렇다면서.

나는 웃으며, “저도 가끔은 너무 춥더라구요.”라고 대답했다.


한쪽을 뺀 이어폰을 다시 껴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그대로 있는 것을 택했다. 앞자리 할머니의 머쓱함을 달래주려는 옆자리 할머니의 노력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눌 이야기는 없으므로 침묵이 이어졌다.



왼쪽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오른 귀는 언제든 다시 말을 거셔도 된다는 신호로 열어두었다. 대화가 시작된 건지 끝나버린 건지 모르는 우리의 대화는 끝맺지 않은 그 자체로 남아 있다. 누구 하나 일방적으로 대화를 단절하지 않는다. 덕분에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묘한 연결감이 이어진다. 홀로 탄 버스에 작은 동행이 생긴 기분. 타이밍만 좋다면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와 함께 즐겁게 대화를 마무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일상에서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상태’로 있는 순간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손, 횡단보도에서 느린 걸음을 맞춰주는 발걸음. 손에 든 오른쪽 이어폰처럼 언제든 대화를 열 준비가 된 귀.


이런 작은 기다림이 차가운 버스 안 공기를 데우듯 우리 마음의 온도를 조절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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