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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Jul 14. 2021

그 해 여름, 나를 살찌운 것들에 대하여

열 살, 어느 여름날의 기억.

할머니는 치악산 아랫마을에서 살았다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시골마을의 낡은 집이었다할머니는 그곳에서 옥수수와 감자 따위를 농사지었고여름에는 모시옷을겨울에는 읍내 찜질방 옷을 지어 팔았다장이 서는 날에는 술떡이나 옥수수빵을 대야에 이고 나가기도 했다. 억척스럽고 부지런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명절에나 보는 손주들에게도 좀처럼 말을 건네지 않았다. "먹어라", "더 먹어라"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빠가 나를 그 산골에 맡겼을 때의 절망감은 상당했다. 여름방학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이었다. 혼자 할머니댁에 덜렁 남겨진 나는 시골의 모든 게 싫었다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먹을 만한 반찬이라곤 계란 프라이가 전부인 밥상도 싫었고재래식 화장실이 무서워 울었으며아무리 울어도 변하는 게 없단 사실에 짜증이 났다아빠에게선 가끔 전화가 왔고 통화는 갈수록 짧아졌다전화 끝에 말하던 '곧 데리러 간다'라는 소리를 믿지 않게 되었을 무렵, 여름이 무르익었다. 아빠와 통화하던 할머니의 입에서 '이혼'이란 소리를 처음 들었다열 살이었는데도 그 뜻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엄마가 한 번도 전화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는 것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TV 채널은 한정적이었고가져온 책은 이미 여러 번 되풀이해 읽은 탓에 손이 가질 않았다동네 아이들과도 몇 번 어울렸지만 깊이 사귀진 못했다할머니는 방구석에 틀어박힌 나에게 별말이 없었다. 그 대신 계란물을 입힌 햄이나 불고기 같은 게 밥상에 올라왔지만, 일부러 그것들에 손 대지 않았다소심한 반항이랄까답답한 상황에 대한 화풀이랄까. 그러나 얕은 반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일하러 나가시면 혼자 덩그러니 있는 집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지직거리는 TV와 방 한 켠에 난 조그만 다락 겸 창고방에 있는 뱀술, 지네술,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방으로 들어오는 각종벌레들. 결국 나는 어영부영 할머니를 따라다녔다. 내 키보다 큰 옥수숫대 사이를 돌아다니고흙에 파묻혀있던 감자를 캐고잠자리를 쫓았다햇볕은 따갑고 주변의 모든 건 저마다 빛을 발산했다모나고 꺼칠었던 내 마음은 그 빛에 슬그머니 녹아들어 갔다.



게다가 참외수박오이복숭아 등… 여름의 달큼함에 식욕도 점점 커졌다. 나는 할머니의 손맛이 담긴 매 밥상에 차츰 길들여졌다. 고구마 순곤드레 나물깻잎순 같은 나물에 눈을 뜨고맷돌에 직접 간 콩국은 우유 대용으로 마셨다뉴슈가를 듬뿍 넣고 쪄낸 옥수수와 감자는 항상 부엌에 있었다밥이 아닌 것도 충분히 끼니가 될 수 있다는 것과세상엔 참 먹을 게 많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햇볕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작물은 모두 싱그럽고 맛있었다. '새 새끼 같다'. 할머니는 잘 먹는 나를 보며 아기 새도 아니고 새끼 새도 아닌 '새 새끼'라며 웃곤 했다난 그 말에 보답이라도 하듯 더욱 열심히 먹었다국수를 먹을 땐 후루룩 소릴 내고밥 먹을 땐 밥그릇을 벅벅 긁고부러 콩 국물을 입가에 허옇게 묻히기도 했다할머니가 주는 애정을 빈틈없이 받아먹고 싶어서, 그러고 있다는 걸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여름이 끝나고 찾아온 아빠는 물기가 쪽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와 둘이 살기 싫다고 불퉁스럽게 굴었으나 무소용이었다. 낯선 곳의 낯선 아이들 사이로 뚝 떨어진 나는 다시 외로워졌다. 부재와 결핍이 곰팡이처럼 번져 속이 가렵고 허기가 졌다. 아빠는 용돈을 넉넉하게 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살이 되지도, 마음을 채우지도 못했다. 



요새도 나는 입맛이 없을 적엔 감자나 옥수수를 사와 쪄 먹는다할머니가 해주었던 맛보다는 한참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그것만 먹힐 때가 있다일부러 부산스럽게 소릴 내기도 한다그리고 그 해 여름을 생각한다선선한 바람과 함께 끝나버린찰나 같았던 나날을 기억한다그 후로도 오랫동안 할머니에게선 언제고 여름 냄새가 났다좀약과 번드르르한 크림과 옅은 땀 냄새가 섞인내가 아프고자라고새 새끼처럼 먹어대던 그곳의 공기를 머금은 냄새. 나는 여름이 되면 얼마쯤 서글퍼진다. 이십년이 훌쩍 지난 그 때의 그 여름, 나를 살찌웠던 것들을 생각하며 이 계절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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