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여파로 다음 날 한 발짝의 걸음도 못 뗄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내 다리는 튼튼했다. 분명 ‘무리했다'는 느낌이 제대로 들었었는데, 엄살이 된 것 같아 억울한 기분이었다. 10시간 가량의 숙면을 취한 덕분일 수도 있다.
이 날 밤은 조천읍 와흘리에 카라반을 아늑하게 꾸며놓은 곳에서 지냈는데, 캠프에 온 것 같은 색다른 분위기를 만끽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어버렸다. 카라반이라 침실의 천장이 낮고 퀸 사이즈 침대 하나만 들어갈 정도의 좁은 공간이었는데, 뜨끈한 전기장판과 라디에이터 덕분에 그렇게 안락할 수가 없었다. 비밀스런 은신처 같은 포근함이 있었다.
사촌동생이 찍어준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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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흘리의 아침은 고요했다.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새 소리만 들리는 시골의 아침 정경이었다. 이 적막은 언제까지고 눌러앉아도 될 것 같은 착각을 주었지만, 법 없이도 살 우린 퇴실 시간에 맞춰 조용히 나왔다. 에코랜드로 이동할 방법을 찾아 서성이던 중, 전기매트를 하나 끄지 않은 게 떠올랐다. 급히 객실로 들어갔는데, 갑작스런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촌동생이 혹시 말 보았냐며, 트럭이 한 대 지나갔는데 짐칸에 생뚱맞게 말이 타고 있었다고 했다. 제주는 이렇게 드문드문 말들이 갑자기 등장하더라.
에코랜드에는 물품보관소가 있었다. 내 2주치 짐을 담은 커다란 캐리어를 집어넣어두고 둘러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가 익숙한 우리에게 현금이란 백 원 한 푼도 없었다. 이곳엔 ATM기도 없었고, 매점에 물어봐도 카드로는 현금을 만들어낼 수 없댔다. 용감한 사촌동생이 나섰다.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정중히 현금과 디지털 화폐를 교환할 생각인 듯했다. 안쪽 식당으로 들어가더니, 곧 인자한 웃음을 지닌 날씬한 할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왔다. 오백원 두 개면 그냥 서비스로 해주신다며, 매점에서 금방 동전을 바꿔주셨다. 그래서 우린 한사코 커피 한 잔을 사드렸다. 역시 제주는 날씨도 사람도 따스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사촌동생이 두리번거리다 이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는데, 아주 활짝 웃으셔서 부탁드릴 용기가 생겼단다. 다정의 힘이다.
따뜻한 마음을 안고 에코랜드로 입성했다. 해리포터에 나올 것 같은 빨간 증기기관차를 타고 칙칙폭폭 이동했다. 우린 다 큰 성인이었지만, 이런 동심을 자극하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이롭다.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은 인생의 무게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널찍한 연못이 잔잔히 위치한 곳에 다다랐다. 얼음이 반쯤 녹아있었다. 어제부터 따뜻한 햇살이 비쳤으니, 이틀째 녹아가는 중일 테다. 어떤 곳에서는 쌀 불리는 소리처럼 작고 부지런하게 얼음이 녹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좋아서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이 흔들리는 물결에 따라 부서졌다.
에코랜드에서 내 시선을 자꾸만 뺏었던 것은 숲의 풍경이었다. 꼬불꼬불 자란 나무와, 그 아래 둥글둥글 늘어선 현무암들, 그 위를 덮은 초록빛 고사리와 이끼, 그리고 그 위에 쌓인 하얀 눈. 색의 조화가 아름다웠고, 이국적인 풍경이었지만, 특히 제주다웠다. 각진 화강암이나 잘 다져진 흙으로 가득한 육지와 달리, 동그란 현무암과 이끼는 너무나 독특했다. 이런 숲을 ‘곶자왈’이라고 부른댔다. 곳곳에 눈이 녹아 신발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덜 녹은 곳만 디디느라 고개만 처박고 걷기도 했지만, 눈 덕분에 곶자왈의 풍경이 더 조용하고 폭신했다. <원령공주>에 나왔던 신비한 숲이 겹쳐 떠올랐다. 에코랜드는 이곳저곳 재미 있는 테마로 꾸며놓았지만, 겨울 한복판이라 라벤더도 없고 동백도 없었다. 하지만 아쉽진 않았다. 곶자왈로 눈의 즐거움이 충분한 공간이었다. 조용한 곶자왈의 숲을 발소리로 채우며 걷는 순간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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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랜드를 구석구석 누비느라 한참을 걸었다. 원래는 근처의 돌문화공원까지 가는 것이 목표였으나, 도저히 어려울 것 같아 함덕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대흘리에 위치한 에코랜드에서 곶자왈을 누비고 나와 함덕해안으로 향했다. 702-1번 버스를 타고. 예상한 버스의 모습과는 다른 자그마한 마을 버스 같은 차가 다가와서 의외였다. 기사님의 운전은 거칠었지만, 풍경을 감상하기엔 충분한 속도였다. 버스로 이동하는 순간이 좋았다. 뚜벅이가 누릴 수 있는 드라이브. 특히 마을 곳곳을 누비는 것이 좋다. 내가 기대한 제주 여행은 제주만의 특별한 정경으로 두 눈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는데, 이건 도심이 아니라 시골 마을을 구석구석 살펴보아야 담을 수 있는 풍경이다. 제주 특유의 독특한 가로수와 돌담들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정겨웠다. 제주의 매력은 시골 마을에 있다.
그렇게 기억나는 마을이 와산리. 와흘리와 대흘리를 지나 마주친 마을이다. 흑색의 돌담을 가늘고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뒤덮고, 간간이 널찍한 밭이 나오고, 그 사이에 모던한 리조트가 군데군데 자리한 곳이었다. 나중에 또 한 번 제주에 올 때는 이 마을에 짐을 풀고 주위의 풍경을 감상해야지 다짐했다. 와산리를 지나면 대흘2리로 접어드는데, ‘초승달이 머무는 마을, 대흘2리’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그래서 곱은달 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굽은 달이라는 뜻이다.) 어떤 마을이길래 초승달이 머물까. 초저녁 서쪽 하늘에 잠시 뜨고 지는 초승달인데, 그 찰나의 시간을 대흘2리에서 머물다니. 이런 생각들을 하며 함덕으로 굽이굽이 넘어갔다. 목을 쏙 빼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것이 뚜벅이 여행의 맛이다. 드문 버스를 기다리고, 그 버스로 마을 하나하나씩 지나치며 구경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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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에 도착하니, 제주에서 본 바다 중 가장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는 오색이라더니, 정확히 다섯 개의 파랑이 있었다. 저 멀리 짙은 파랑, 중간쯤 짙은 청록색, 얕은 바다의 하늘색이 있었고, 햇빛에 따라 옥색으로 비치는 곳, 모래가 비쳐 누리끼리하게 보이는 곳도 있었다. 함덕은 그저 풍경이 아름다웠다. 저녁엔 저물어가는 하늘이 아름다워 바다를 한참 등지고 서있었고, 아침엔 맑고 푸르게 반짝거리는 바다가 아름다워 하염없이 넋을 놓았다. 함덕에 머무른 동안엔 맑은 날들이 이어졌다. 바다의 정경을 마음껏 누리라는 제주의 배려였다.
함덕에서는 바다를 즐겼고, 음식을 즐겼다. 함덕에서 먹은 음식은, 우선 당근과 시금치를 활용한 버거를 먹었고, 블루하와이에 치즈를 함께 먹고, 매운 닭발을 먹었다. 이 날은 주로 혀의 즐거움을 따랐다. 그리고 반신욕이 기억에 남는다. 숙소에 큰 욕조가 있어서, 마침 한라산에서부터 계속 쌓인 피로를 풀자는 마음이었다. 일상에서는 일 년에 한 번도 드문 반신욕을 제주에서 즐기니 꽤나 낭만적이었다.
여행을 끝내고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제주의 바다를 생각하면 함덕의 바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도두부터 평대와 세화를 누벼도 함덕이 가장 짙은 색채로 기억에 남았다. 함덕 바다는 해수욕보다는 바라보기 좋았다. 그래서 다음에 갔을 때는 패러글라이딩을 꼭 해보려 한다. 바다 위를 둥실둥실 도는 패러글라이딩이 내 눈에 좋은 풍경으로 담겼지만, 한번쯤은 풍경을 장식하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함덕 바다 말고도 손 꼽히는 바다가 또 하나 있었지만, 이 곳은 나중에 적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