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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Mar 19. 2019

패션은 예술이다?

패션에 대한 이야기, 그 프롤로그

저는 패션을 참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참 싫어요. 너무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거든요. 정말 이 세계는.... 정말 화려하고 예뻐서 눈이 돌아가지만 그 뒤에 있는 그림자가 매우 짙고, 얼룩졌습니다. 그 모습에 정도 많이 떨어지고, 진저리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을 완전히 경멸하지 못하는 이유는 패션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지금 패션계는 사춘기 같습니다. 정확하게는, 나쁘게 물들고 있는 질풍노도 시기의 청소년이죠. 그렇지만 그 속에는 순수하고 올곧은 싹수가 숨어있는 새나라의 어린이에요. 이 싹수가 바로 제가 기대를 놓지 못하는 부분이죠.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예쁘고 잘생긴 얼굴을 꾸미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그 겉모습만 보고 깊은 호감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 호감은 자라나는 아이에게 긍정적인 호감일까요? 아니죠? 이렇게 더욱 패션은 더 비뚤어져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제가 느끼는 패션계의 폐단을 요목조목 밝혀볼 생각입니다. 삐뚤어지는 이 사춘기 아이가 잘못하고 있는 행동들을 지적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바로잡아주는거죠. 원래 가지고 있는 순수하고 놀라운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 가능성이란, 패션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입니다. 패션이 예술일 때, 패션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할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예술성'에 대해 먼저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술이 뭘까요? 저는 예술대학의 수업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음악과 미술, 무용, 문학, 너나할 것없이 거의 모든 예술장르를 사랑하는 저는 사실 예술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으로 이해해왔습니다. 듣기 좋은 음악, 아름다운 몸짓, 아름다운 그림 등등. 그런데 현대예술에서는 참 괴상한 것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불협화음이 가득한 음악도 등장하고, 아무렇게나 칠해진 그림, 그로테스크한 몸짓이 가득한 춤. 아름답다고 보기는 힘들었죠. 그렇다고 이들을 예술이 아니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죠. 그때부터 예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 나름대로 정답을 찾게 된 계기를 만났죠.


서울역 고가도로가 폐쇄되고 서울로7017이 새롭게 꾸며졌습니다. 그리고 개장기념으로 그곳엔 신발들로 가득한 예술작품이 세워졌어요. 헌신발 3만켤레와 폐타이어, 나무, 꽃 등으로 제작된 이 작품. 이 작품은 정원디자이너 황지해 작가가 신발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가치관의 위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며 특히 자동차, 도로와 대조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셀 수도 없이 많은 그 신발들은 너무도 자기주장이 강한 각각의 색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도 타고 더러웠어요.



사람들은 퀴퀴한 냄새를 지적하고 외관이 흉물스럽다며 철거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신발트리'의 작품성까지도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예술작품이라고 가져다놓았냐, 이런 식이었죠. 여기서 "이것이 예술이냐"하는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예술작품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인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작품이라는 말만 갖다 붙이면 뭐든 예술이 되는 건지, 그 의미와 경계가 참 모호합니다. 마르셸 뒤샹은 변기를 가져다 놓고 예술작품이라 칭하지 않았습니까.


마르셸 뒤샹의 '변기'

'신발트리'의 논란에 대해 진중권 박사는 대중이 좋아하는 예술만이 예술이냐며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달라 하였습니다. 그래요. 특정 예술작품을 대중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저 취향의 문제일 뿐 작품의 예술성까지 판단할 수 있는 요소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작품을 통해 "왜 작가가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예술성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닐까요? 어떠한 오브제로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관객들이 먼저 그 의미를 궁금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죠. 사실 그 의미도 꼭 작가가 생각했던 의미와 같을 필요도 없어요. 그저 그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충분히 깊게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고 여러가지 의미를 양산해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작품 감상의 묘미인 거죠. 즉, 예술작품의 의무는 작가가 원하는 질문의 생성, 그리고 감상자의 고민과 해석입니다. 하다못해 변기라도, 전시장에 들여놓는 순간 왜?라는 질문을 관객으로부터 이끌어내고 개개인의 다양한 해석으로부터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다면 비로소 예술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신발트리'는 왜 서울로7017 한복판에 이렇게나 많은 헌 신발들이 잔뜩 진열되었는지 충분히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 쓰레기에 대한 새로운 주혹은 자동차/도시와 대조적인 가치, 걸음/여유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으니 충분히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생각되네요. 어쩌면 이 '신발트리'로 어디까지 예술작품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지고 생각해볼 기회까지 생겼으니, 이러한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에서부터 매우 높은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작가가 감상자에게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순간 비로소 예술작품이 등장합니다. 패션은 흔히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작품들로 이해되는데, 사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심오한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땀흘렸습니다. 그 이야기들도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겠죠. 이 많은 메시지들이 거쳐간 패션은, 역시 예술입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문제들로 그 예술성이 빛나지 않는 거죠. 패션의 예술성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면 패션에서 전달할 수 있는 가치는 사회에 정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 저는 이제 패션의 문제점도 까발리고 예술성도 찬양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유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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