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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Feb 14. 2024

경계 위의 삶

현재 나는 예술대학 소속 대학원생이다. 이런 내 신변이 낯설다. 나는 예술대학보다 문과대학이 더 친근하고, 내 정체성과 가깝다고 여긴다. 학부 시절 소속되었던 문과대는 정체성과 사고방식이 말랑말랑했던 나의 오춘기 시절을 책임졌고, 세상을 해석하는 시각을 만들어주었다. 내 뿌리는 문과대학에 내렸고 예술대학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듯하다. 전공과의 쿵짝이 탁월했던 덕분에 문과대는 내게 각인처럼 흔적을 남겼다.


문제는 지금 뿌리와 가지의 방향이 너무 달라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내 전공은 당신이 떠올리는 패션과 관련된 학문을 모두 빗겨나간다. 복식미학 또는 Fashion Studies는 아무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정의하기 까다롭지만 시도해보자면, 패션을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패션을 설명하기 위해 철학 이론을 빌려오기도 하고, 패션에서 나타나는 젠더 이론을 분석하기도 하며, 데이터 분석을 통해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패션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한없이 광범위해질 수 있는 분야로 이해하고 있다. 의상학과와 국문학과의 만남이 복식미학으로 흐른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문과대에서 배웠던 시각으로 패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패션 전공 중 가장 학술적이고 인문학적인 전공이라 느낀다. 그래서 나는 이 학과에서 학술적 성격이 돋보이는 편이라 생각하는데, 골수까지 인문학적인 문과대 대학원생을 만날 때면 내 학문의 깊이가 그렇게 얕아 보일 수가 없다. 또 실무 중심의 학과에서 학술적인 이야기가 얼마나 영향력 있을지도 우려스럽다. 패션과 학문이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가 내 머릿속에서는 하나로 합쳐져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이 패션과 학문을 구분하는 그 경계 바로 위에 내가 서 있다.


패션이 본래 그렇다. 예술 같으면서도 예술이라 하기 어렵고, 학문이 가능한 분야이면서도 학문과 거리가 매우 멀고, 어떤 분야보다 진보적인 듯하면서도 짙은 보수성을 지녔다. 한 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분야다. 늘 이 양면성에 매력을 느껴왔는데, 그 양면성이 불러일으키는 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나 또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세상의 구분에 의해 지배 받기 때문이다. 경계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경계 위에 서 있는 일은 외로운 일이다. 선분 위는 면보다 좁고, 협소하며, 그래서 소수만 아는 곳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규모가 작고, 학술적이고… 이런 특징은 자본주의와 거리가 멀다. 돈을 버는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나는 내 전공의 정체성이 되었든, 경제성에 되었든, 그 불안정성에 한탄할 수밖에 없다. 한탄의 주체와 대상은 모두 나 자신이다. 이 공부를 소망했던 독특한 취향을 탓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수많은 학문을 두고 복식미학이라는 분야를 어떻게 알아차렸으며, 전공까지 하고 있는지 그 우연이 중첩된 행보가 어처구니가 없다.


다행인 건 내일에 대한 걱정에 파묻혀 있더라도 후회는 절대로 안 하더라는 것이다. 내가 미래의 어둠에 대해 탄식하니 누군가가 학교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냐고 되물었는데, 그 질문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새삼스러웠다. 그동안 후회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결국 지속하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 현재에 대한 만족감이 얼마나 충만하면 과거와 현재에 대한 사유 없이 미래에만 주목할 수 있을까. 여기서 불안정한 미래를 무한한 가능성으로 치환하면, 내 삶은 남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경계선 위의 불안을 끌어안고 살겠다 다짐한다. 선택지는 이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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