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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Feb 23. 2024

아날로그 비망록

세상은 효율과 편리로 설명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효율을 계산하고 효용을 추구하고 편리를 확보하기 위해 분투한다. 그래서 우리는 빠르고 매끄럽게 흘러가는 환경을 얻었다. 무엇이든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세상. 그 바탕엔 디지털이 있다.


문득 디지털 세상에 익숙해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아날로그의 방식을 배척하게 되면서 아날로그의 탁월한 부분을 잊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류는 미래지향적이니까. 우리는 성장을 해야 하니까. 아날로그는 곧 구식이자 퇴보였다. 옛날의 방식은 고루하고, 기술의 발전은 눈부시기만 하다.


디지털 환경은 세상을 숫자로 변환하고 계산한다. 이는 곧 삶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간과하는데, 이것이 아날로그 방식의 핵심이다. 아날로그의 삶에는 비물질적인 에너지가 있다. 편리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우리는 효율과 효용과 편리를 얻었음에 만족하지만, 이로 인해 잃은 것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를테면 도보로 30분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지하철로 연결되면서 걷기가 불러오는 사색을 잃었다든가, 비대면 화상 수업으로 현장감 짙은 참여의 감각을 잃었다든가, 키보드로 글을 쓰면서 직접 눌러쓰며 몸과 마음에 문장을 새기는 시간을 잃었다든가.


글을 쓸 때, 예전에는 하얀 화면에서부터 시작했는데 이제는 노트에 직접 끄적이는 것부터 출발한다. 필기는 입력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생각이 정리되는 정도가 다르다. 중구남방으로 튀어오르는 생각을 모두 잡아채 여기저기 적어두고, 동그라미 세모 네모 화살표를 그려가며 도식화하고, 두어번 덧그리고 다시 쓰다 보면 글의 구성이 잡힌다. 글을 직접 적으면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며 시간을 가늠하다 보면, 글을 직접 쓸 때 얻을 수 있는 정리정돈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편리는 많은 것을 생략한다.


인류가 살아온 짧은 역사 중 디지털의 역사는 찰나다. 무수한 시간을 아날로그의 방식으로 살아왔으니, 아날로그는 우리의 몸이 세상과 부딪히는 방식일 것이다. 공책에 적는 건 몸이 기억하는 방법이고, 거리를 걷는 건 몸이 생각하는 방법이고, 사람을 만나는 건 몸이 교류하는 방법이다. 디지털 디톡스는 아날로그를 잃어가는 데에서 오는 위기감이 불러온 게 아닐까.


아날로그의 상실은 삶의 파편화와 연결된다. 분 다뉘로 시간을 쪼개고 나누며 숫자를 줄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삶의 방식. 우리의 사고방식도 이렇게 뚝뚝 끊겨 있을까. 연결된 일상과 생애가 아닌, 부분으로 나누어진 구획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우린 연필을 깎는 시간에서 오는 여유를 영영 잃었고, 딸깍 소리 한번에 샤프심을 보충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숏폼 콘텐츠로 더 빨라지고 더 파편화된 세상을 본다. 현대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인류를 어떻게 이끌까.


느린 시간의 가치를 모르기에 편리를 위해 나무를 베어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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