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주인공 레이디 버드의 엄마는 다소 모진 편이었다. 다정하지도 않고, 잔소리가 많았다. 한번은 레이디 버드가 엄마에게 “Do you like me?”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는 “I Love you.”라고 답한다. 레이디 버드는 다시 묻는다. “Do you like me?”. 강렬한 장면이었다. Love와 Like의 차이를 처음으로 생각해보았고, 그 미묘한 차이가 모든 관계를 설명했다. 나와 나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그저 당연할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것은 마음에 차고 든다는 뜻이다. 나를 완전히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충분히 좋아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난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좋아하고 미워한다. 내 얼굴을, 내 몸을, 내 행동을… 거울을 보는 건 나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타인에게 보이기 마땅한 상태인지 점검하고, 좀 더 나아보이도록 옷과 몸과 얼굴의 매무새를 다듬기 위함이다. 이때 정돈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외관에 그어진 빨간 펜들이 있고, 내 눈은 그걸 완전히 흡수했다. 완전한 대변자다.
이 대변자는 내 몸과 얼굴에서 눈에 띄는 지점을 습관적으로 찾는다. 서툴고 미완성 같고 불균형적이고 모호한 부분들.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사회적 기준이 탑재된 내 눈에는 걸리적거리는 게 많다. 평소에 신경쓰지 않아도, 가끔씩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땐 거울에 비친 얼굴만 바라보아도 답답하고 억울해진다. 그동안 안티에그에서 다양한 사이즈와 형태를 가진 몸의 아름다움을 말해왔음에도, 그리고 협소한 미적 기준을 함께 지적해왔음에도 나는 절대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완전히 체화한 상태다.
이 미적 기준을 바탕으로 나에 대한 내 감정은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어느 날은 예뻐보이고, 어느 날은 못생겨보인다. 이 주관적 시선을 통제하지 못해 늘 사랑과 미움을 넘나든다. 나에 대한 고정된 인식이 없으니, 그날의 상태와 기분에 따라 나에 대한 사랑이 결정됐다. 또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며 기대와 실망을 끊임없이 느꼈다. 불안정했다. 내 존재에 대한 정의가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나를 좋아하고도 싫어하는 감정을 쉼없이 오가는 일은 매우 피로하다.
사람들을 둘러보면, 미적 규범을 각자의 세기로 밀고 당기며 적당한 방식을 탐구해간다. 누군가는 플러스 모델을 하며 규범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근육을 잔뜩 키우기도 한다. 이들의 도전은 자기 애정이 기반이 되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규범의 수용과 거부를 오가며 타협점을 찾더라도 나에 대한 애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자기애는 일상의 여러 핵심적인 근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붙잡고 고정해야 한다.
오늘 요가하기 전, 늦은 오전의 나른한 햇살을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있었는데 ‘내가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 적이 있었나' 하는 물음이 떠올랐다. 오롯한 나 자신의 시선으로 나를 보아준 적이 있었나? 아니, 보아줄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밉게 보이더라도 내가 애정을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부분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모양이 예뻐서, 날씬해보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맥락으로 좋아해볼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