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관리 담론 속 강요된 가치
“운동하시나요?” 어느새 이 질문이 익숙하고도 당연해졌다. 건강을 위해, 자기 관리의 일환으로, 몸매 유지를 위해 우리는 운동을 의무와도 같이 여긴다. 그리고 운동을 하지 않을 때는 자신을 방치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죄책감을 느낀다. 관리되지 않은 몸, 특히 날씬하지 않은 몸은 자기 관리의 실패이자 게으름의 표시가 되었다. 언제부터 날씬하지 않은 몸은 나태함의 상징이 된 걸까? 몸매, 자기 관리, 성공은 어떻게 연결되며, 우리는 그 연결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기사에 따르면 어떤 통계는 날씬할수록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진다고 한다. 날씬한 몸은 더 많은 사회경제적 기회를 얻고, 성공적인 자기 관리, 나아가 커리어 개발까지 연결되는 반면, 날씬하지 않은 몸은 사회경제적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날씬하지 않음에 대한 이유를 해명하고, 인격과 성실성, 업무 태도와 능력까지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통계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날씬해진다고 한다. 상류층은 사회에서 이상적인 존재로 머물러야 하므로, 이상화된 몸을 갖추는 것은 지위에 대한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이다. 날씬한 몸은 사회적 지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되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했듯, 몸이 계급의 상징이 된 것이다.
여기서 날씬함과 사회경제적 지위, 둘 중 무엇이 먼저인지 판가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날씬한 몸을 유지하는 자기 관리가 계급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것이 중요하다. 날씬한 몸은 계급에 영향을 받는 동시에 계급을 견고히 하는 수단이다. 그렇다면 왜, 날씬함은 사회경제적 지위와 연결되는 것일까?
자기 관리는 신자유주의적 개념이다.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개인이 사회의 통치 방식을 내면화함으로써 스스로를 규제하는 것이다. 개인은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고 관리한다. 이로써 스스로 사회 규범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그럼 그 관리의 방식에 왜 몸이 포함되는 것일까?
날씬한 몸을 이상화하는 것은 서구의 방식이다. 비서구 문화권에서는 오히려 통통한 몸이 이상적으로 여겨진 경우가 많았다. 서구에서 날씬한 몸이 중요해진 것은 코르셋의 역사부터 살펴봐야겠지만, 여기서는 근대적 맥락에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19세기 미국으로 가보자. 당시 미국에서는 건강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건강개혁운동은 개인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도록 의학 지식의 대중화, 식생활 개선 등을 추구하는 운동이었다. 기존에는 의사만이 환자의 건강을 판단하고 관리할 권리와 자격을 가졌다면, 건강개혁운동은 의료 지식을 확산함으로써 개인이 직접 건강 관리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운동에서 중요한 점은 개인을 자기 관리의 주체로 인식했으며, 개인을 관리함으로써 사회의 번영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이 몸을 기반으로 자기를 관리하고 이를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는 신자유주의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몸의 관리는 사회가 노동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방법이다. 개인이 자발적으로 건강을 관리하면 사회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상적 몸매와 자기 관리를 연결시킴으로써 개인의 건강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날씬한 몸은 사회적 이상을 넘어서 바람직한 상태, 즉 누구나 추구해야 하는 도덕적 규범과도 같아졌다. 반대로 날씬하지 않은 몸이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회 공동의 목표이자 의무에 어긋나며,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로 여겨진다. 날씬한 몸은 자본주의 사회가 휘두르는 통치의 도구인 셈이다.
미국에서는 건강개혁운동 이후에 비만이 나태함의 산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다. 개인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움직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완수하기 위한 필수적인 노력으로 연결되었고,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신체는 척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자기 관리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동이 되면서 몸의 형태는 자연스럽게 이를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자기 관리는 자본과 깊이 연결된 행위다. 적합한 운동과 음식 섭취를 통해 몸을 가꾸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이 필요하다. 이처럼 자본과 계급이 개입하자 날씬한 몸과 날씬하지 않은 몸에 각각 더 뚜렷한 가치가 반영되었다. 이를테면 날씬하지 않다는 것은 사회적 이상을 추구할 만한 기반이 없는 상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날씬함의 실패는 계급적 실패와도 연결되었다.
극도의 빈곤과 기아를 겪는 국가를 제외하면, 가난함은 이제 깡마른 몸과 연결되지 않는다. 편의점 음식, 패스트 푸드 등으로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음식을 구입할 수 있게 된 반면, 다양한 영양소를 갖추고 싱싱한 재료가 들어간 요리를 먹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빈곤할수록 음식의 섭취가 불가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음식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진 것이다. 저렴한 패스트푸드의 확산으로, 빈곤층은 못 먹어 마르는 것이 아니라 살이 찌기 시작했다. 또 비만에 게으름과 의지 박약이라는 낙인까지 적용되고, 개인의 회복 가능성을 깎아내림으로써 비만은 빈곤의 악순환에 포함된다. 날씬함의 문제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와 계급의 위계 속에서 자라났다.
자기 관리는 건강한 몸이 이상화된다는 점에서는 건강한 생활로 사람들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차별적 구조가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점에서 얼마나 긍정할 수 있을까? 자기 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이며, 건강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누구에게나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몸을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서가 굳어진 지 오래다. 몸매는 자기 관리로 연결되고, 이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도덕적 영역까지 연결되었다. 우리는 관리하는 자아를 선망하고, 관리하지 못하는 자아를 단죄한다. 관리를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관리의 실패란 삶의 실패인가? 그 실패가 영원히 개인을 예속하는지도 묻고 싶다. 우리는 자기 관리에 매몰되어야 하는가?
참고문헌
The Economist. The economics of thinness (2022. 12. 20)
Live Science. The real skinny: Expert traces America’s thin bosession. (2012. 1. 27)
박상언. (2018). 19세기 미국 사회의 의학 담론과 몸의 성격 – 새뮤얼 톰슨과 실베스터 그레이엄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78(2), 139-168.
문화예술 플랫폼 Antiegg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