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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Oct 02. 2020

<Why Women Kill>: 여성의 살인 이야기

여성의 살인에 얽힌 성장과 극복

※스포주의


세 여자가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체는 여성. 도덕적 판단을 떠나서 살인이라는 행위를 하게 되기까지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변화를 겪으며 어떻게 성장하는지 아주 두드러진다. 그래서 우선 '살인'이라는 행위를 둘러싼 윤리적 판단은 배제하고, 살인으로 귀결되기까지 그들이 걸어온 인생을 들여다본다.



베스 앤 Beth Ann Stanton


완벽한 아내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함께 살며 온갖 집안일을 야무지게 해낸다. 그리고 완벽한 아내로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주문을 외웠던 여자다. 여성의 고정적 역할에 갇힌 전형적 인물로, 남편의 바람을 알게 된 후에도 사실을 부정하는가 하면, 자신이 더 완벽하게 집안일을 하거나 더 예쁘게 꾸미면 남편이 다시 자신을 사랑해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베스앤은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물론 쉐일라라는 조력자가 있었지만. 베스 앤은 남편의 바람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상대를 직접 만났다. 그리고 한국드라마에서는 무조건 악역으로 등장할 여자, 에이프릴과 친구가 되고, 진심을 준다. 쉐일라는 미쳤다고 비난하지만 베스 앤은 굴하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의 주체적인 결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베스 앤은 에이프릴의 따뜻한 인간성에 본인의 분노를 잠시 접어두고 그를 안타깝게 여길 줄 알았다. 그리고 꿈을 좇는 에이프릴을 지켜보고 응원하며 본인의 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넌 못 할거다'라며 자존감을 깎아내렸던 남편의 말을 극복하고 실컷 피아노를 친다. 음미하며 치고 싶은대로 친다. 자신의 부족함만을 탓했던 그는 서서히 자기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그는 한발짝 내딛을 수 있었다. 


그는 딸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 책임은 남편의 외도에 있었지만 남편은 베스 앤을 탓했고, 그는 자책하며 살아왔다. 그는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짙게 미소 짓지만, 그 미소에는 누구보다도 깊고 뜨거운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철저히 살인을 다짐했다. 딸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베스 앤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여성의 고통을 방관하지 않았고,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두 여성의 인생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인 복수극을 주도했다. 베스 앤은 남편이 죽을 수 있는 무대를 직접 꾸몄고, 남편이 베스 앤의 의도를 깨달았을 때 짓는 그 표정은, 통쾌하기 그지 없었다. 베스 앤은 남편의 죄를 직접 심판했고, 남편의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굉장한 장면은, 마지막 장면. 모든 사실이 탄로났지만 에이프릴과 베스 앤은 여전히 친구였고, 심지어 롭과 에이프릴 사이의 아이까지 함께 키운다. 모든 선택은 베스 앤이 직접 내린 결정이었다. 그 당당하고 여유있는 모습이란! 그는 성장했다.



시몬 Simone Grove


시몬의 삶은 완벽했다. 삶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가 가장 소중했다. 외적인 가치만을 열심히 좇았다. 남편이 게이란 것을 알아도 슬퍼하기보다는 이혼으로 인해 떨어질 평판부터 걱정했다. 친구라고 해봤자 서로의 가십에만 귀 기울이는 사이였다.


하지만 토니와 칼과의 관계가 변화하면서 사랑과 우정에 대한 그의 가치관도 변화한다. 토니, 그 어처구니 없게 어린 연하남을 만나면서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풋풋한 사랑을 깨닫는 건 참 아이러니했다. 우여곡절 끝에 토니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는 토니의 말에 시몬은 내가 그 말을 듣는 마지막 여자는 아니겠지만 처음이라서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시몬은 다이아몬드 선물보다 사랑한다는 말에 감동 받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남편 칼. 시몬에게 친구란 잘난 모습만 보여줘야 했던 존재였지만, 칼은 부족한 점을 알고 보듬어주며 함께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였다. 이걸 깨달은 시몬이 칼과 함께 서로의 사랑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모습은 참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칼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한다. 시몬은 인생을 함께 했던 동반자에 대한 우정으로 칼의 곁을 지켰고, 그의 의리는 굳세었다. 부유했던 그가 돈 때문에 아끼던 그림마저 팔 정도로 칼의 병원비가 많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상관 없던 거였다. 표정이 아주 편안해보였다. 돈과 지위에 연연한 시몬은 이제 없었다. 그리고 그는 칼의 마지막을 직접 배웅할 용기를 낸다. 병원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갈 모습을 두려워하는 칼을 이해하고, 그의 의사를 존중한다. 그는 칼을 죽였지만, 어쩌면 친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시몬은 에이즈연구기관의 후원자로 등장했다. 칼을 비롯해 남편을 세 명이나 두었던 시몬이지만, 이제 그는 홀로 등장했다. 누군가 보았을 때 완벽하고 완벽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시몬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그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홀로 어떤 삶을 꾸리고 나아가는지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몬 또한 당당했고, 성장했다.



테일러 Taylor Harding


테일러는 그의 성장이 두드러진다기보다는 2019년이라는 배경으로 인한 상징성이 컸던 것 같다. 다른 두 주인공에 비해, 변호사라는 똑똑하고 촉망 받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고, 특히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집안을 이끄는 가장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남편 일라이는 시나리오 작가였지만, 변변한 작품을 내지 못한 지 오래 되었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으며, 심지어 마약중독의 이력도 있었다. 하지만 테일러는 일라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제이드에게 흔들리고 제이드가 하는 감언이설에 속아 테일러를 배척한 그 어리석고 나약한 놈이 뭐가 이쁘다고. 이 부부의 이야기는 결말 또한 테일러의 멋진 활약으로 마무리된다. 철저히 악당으로 세팅된 제이드로부터 일라이를 구해내고, 제이드에게 일격을 가한다. 그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낸 훌륭한 가장이었다. 테일러의 살인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테일러 또한 양성애자로서 개방적인 부부생활을 즐겼다가 둘 사이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는 등의 나름의 성장을 보이긴 하지만, 왜 여자가 살인을 하냐는 드라마 제목과 연결지었을 때는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물론, 인간관계에 의해 힘들어하고 고민하다가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며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 더욱 책임 있는 가장의 모습으로 거듭난다는 점에서 상당히 멋진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테일러는 이성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는 인물이기에 바람보다는 합의된 개방적 생활을 통해 제이드라는 외부인의 침입을 만들어낸 게 자연스러웠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킬링이브'라는 작품이 '킬러'나 '수사요원'이 등장하는 남성중심적 범죄 장르에서 여성 킬러와 그를 쫓는 여성 요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스토리에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세 번의 살인사건에서 살인이라는 행위를 이끈 주체는 여성이다. 이러한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인 행위 자체보다도 살인까지 다다른 여성의 삶을 조명한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들의 생각과 시각을 비췄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삶과 역할, 인간관계를 어떻게 직시하고,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그들의 변화에 환호했고, 그렇기에 여운이 참 강했다. 그들의 삶을 엿보듯 아주 밀접한 시각으로 쓰여진 서사였기에 더욱 공감되었던 작품이었다.


이야기의 전체적 흐름뿐만 아니라 주변 요소도 구성이 참 좋았다. 백인 여성, 아시안 여성, 흑인 여성을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도, 성소수자에 대한 서사도 포함된 점도 너무나 흡족스러웠다. 이외에도 세 이야기가 같은 장소, 다른 시간에서 전개되어 서로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의도한 연출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아주 효과적이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또, 세 주인공의 시대가 다른 만큼 패션 스타일 보는 재미도 참 쏠쏠했다. 테일러가 2019년을 배경으로 이 시대 보편적인 편안한 옷차림을 많이 보여줬다면, 베스앤의 원피스는 선명한 원색을 뽐내며 1960년대의 레트로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시몬은 인물의 화려한 삶과 더불어 의상에서도 1980년대 디자이너 브랜드 작품의 눈부신 맥시멀리즘이 돋보인다. 표면적으로나, 이면적으로나 여러모로 볼 재미, 생각할 재미 가득한 작품이었다. 시대도, 성격도, 스타일도 너무나 다른 세 여자가 살아가는 모습에는 각기 다른 매력들이 있어서 아주 푹 빠져서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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