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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량 Dec 06. 2020

<캐리비안의 해적> : 주인공의 불완전한 도덕성에 대해

최선을 선택한 해적의 정신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보았다. 아주 유명한 작품이지만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억에 남는 건 단연 잭이라는 인물이다. 어떻게 이런 인물을 탄생시켰을까? 종잡을 수 없고, 그렇기에 매력적이다. 팔을 휘두르는 특이한 몸짓하며, 말할 때 얼굴과 몸을 자유롭게 흔드는 모양새까지, 작가와 조니 뎁의 합작으로 완성된 잭이라는 인물은 세상에 유일무이하다.



위기 상황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헤쳐나가는 창의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끔가다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여주는 귀여움이 있다. 쉽게 배신하고 자기 안위만을 중요시 여기면서 해적의 피가 골수까지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면하지 않는 의리도 보여준다.


이 양면성이 있기에 우리가 잭이라는 인물에 완전히 사로잡힌 게 아닐까. 나는 보통 영화 속 인물이 의리 없이 배신하거나, 보통의 도덕적 관념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불편을 느꼈다. 이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완전무결한 인간상을 바랐던 것 같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지만 이것은 환상이었다. 가상이라지만 현실이 반영된 곳에서,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세상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무조건적으로 이타적이고 완전한 선을 추구하는 인물을 바랄 수는 없었다. 


드라마에서도 그랬다. 지금까지 우리가 많이 봐온 이야기에서는 선한 주인공과 악한 주인공의 대치, 그리고 권선징악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많았다. 평면적인 인물과 구성이다. 그러나 인물은 악하기만 할 수 없듯 선하기만 할 수도 없는 거였다. 우리가 열광했던 스카이캐슬, 염정아가 연기했던 한서진은 한 마디로 이기적이었고, 나아가 비윤리적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남의 아이의 불행, 고통 정도는 모른 척할 수 있는 둥근 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절박하단 걸 우리는 알았고, 그의 욕심은 우리의 욕심과도 닮아있으며, 그의 내적갈등 또한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욕심을 비난했지만 동시에 안쓰러웠다. 그렇기에 그가 밤새도록 고민하고 힘든 결정을 내리며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는 그 변화가 참 기꺼웠다.


약하지만 강했던 엘리자베스 스완 (Pirates Of The Caribbean: At World's End)


잭도 그랬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적과 협상하고,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의 상황을 이용하기도 하고,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싸우기도 하고,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면서 함께 헤쳐나간다. 배신도 가능하지만, 의리도 가능하다. 밑도 끝도 없이 다부진 의리가 아닌, '나는 다른 쪽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너희를 선택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 얄팍할 수도 있는 의리가 더 굳세어보인다. 이건 잭뿐만 아니라 윌이나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다. 이제 완전한 해적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배신은 쉬운 선택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싸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서로를 배신하고 배신당하다가 다시 만나서 함께 싸우는 순간이 등장하니 그 연대가 더욱 빛났다.  


잭뿐만 아니라, 많은 주인공들이 그랬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는 매우매우 나약했지만(프로도가 등장하는 씬마다 화날 정도로), 힘겹게 이뤄낸 성과는 나약한 영웅이 노력하여 이뤄냈기 때문에 의미있기도 했다. 오히려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We are family'라며 인물들끼리의 강한 유대감을 무조건적으로 강조할 때, 그 뿌듯하게 웃는 모습이 가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우리는 한 인물들의 다양한 면모를 본다. 장점도 보이고, 약점, 단점, 부족한 점들을 모두 바라본다. 나는 그들이 완전하길 바라지만 그들은 나와 같으며, 그들의 단점은 곧 나의 단점이기도 했다. 이들의 이런 이중성은 실망스러운 부분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부분이었고 오히려 더 다양한 선택지와 입체적인 흐름을 민들어낸다. 이중적 성향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선택지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로 한 선택이 더 가치 있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좀 더 어려웠고, 힘겨웠지만 결국 해냈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 밑도 끝도 없이 착한 게 아니라, 갈등되지만 선을 택했다는 것. 우리가 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그 지점. 그게 우리가 스스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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