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내가 꿈꾸는 삶이란
나와 남편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우리는 부부학교도 가고 결혼 관련 서적을 8권 넘게 읽었다. 이런 노력들이 수박 겉핡기인줄 결혼하고 수없이 싸움박질을 하고 나서야 알았지만, 당시에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임했다. 결혼비용을 합치고 온갖 형식을 최소화하였기에 크게 힘든 일은 없었지만, 남편은 축가를, 나는 기타 연주를 연습하느라 바빴다.
드디어, 결혼식 당일. 우리는 열심히 축가를 많은 하객 앞에서 시작했다. 축가 도중 내가 기타 연주를 틀렸다. 에잇! 다행히 우리는 틀렸을 때 다시 시작할 지점을 협의해 뒀다. 자연스럽게 재시작하였지만 또 틀렸다. 에잇! 다시 재시작하였다. 또 틀렸다. 에잇!
“그… 만. 그만. 그만하거라.”
시어머니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다급하게 손짓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긴장하고 있는 상황인걸 인지하고 있었다. 긴장은 내가 아닌 하객들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멈출 수 없었다. 내 연주가 끝나면 남편이 내게 키스를 해주어야 한다. 우리 결혼식의 클라이맥스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기타를 들고 앉아있는 신부에게, 신랑이 몸을 살짝 숙여서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나는 그 키스를 받아야 했다.
‘조금만 기다리셔들, 오늘은 내 결혼식인걸.’
다사다난했던 우리의 결혼식은 끝이 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잠깐이지만 유학 준비를 하던 설렘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대로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너무나 곤욕이었다. 이대로 지내다가는 남편을 한없이 원망할 것만 같아서 방도를 찾아야 했다. 남편이 적어도 3-4년은 직장생활을 할 것 같은 상황이고, 나는 아이도 원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이대로 살게 될 것만 같았다. 평범한 삶을 원하는 남편은 행복할 수 있겠지만 도전하는 삶을 원하는 나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와 남편이 살아온 삶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남편의 가정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힘들게 지냈지만,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가난하게 자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며 무난한 삶을 살았다. 그에게 있어 큰 변화나 도전은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몰라도 현재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나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난에 치 떨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나와는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한량스러움을 선비 다움으로 착각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대의 나는 현실을 회피하는 욕심쟁이에 불과했다. 나의 가치를 높이고 싶었고, 가난과 멀어지기 위해 부유한 삶을 향해 끝없이 도전했다. 배움을 멈추지 않기 위해 돈과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20시간 동안 깨어있던 날도 허다했다. 결혼 전후의 나는 조금 여유를 찾았지만, 삶에 대한 도전과 노력의 시간이 멈춰지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산화탄소로 가득 찬 우주선 안에서 산소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는 모습 같다. 헤매다 헤매다 더 많은 산소가 필요해지게 되는 모순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엉거주춤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모습. 그래도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만 같다.
유학을 제외하면 나의 제2의 꿈은 세계여행이다. 숨 막혀 죽느니 꿈이라도 꾸며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에게 5년 후 세계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남편의 우유부단함은 또 한 번 사랑스럽게 작용했다.
그래, 우리 5년 후에 세계여행 가자.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남자와 결혼 잘했다고 생각하고,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에 돌입했다. 우리는 2013년에 첫째 아이를 낳고, 2016년에 둘째 아이를 낳아서 둘째 아이가 3살이 되는 해인 2018년에 세계여행을 갈 계획을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내가 추위를 싫어하니 가능한 한 따뜻한 나라를 가기로 하고, 누구네 가족처럼 버스를 대절하기로 하고, 전세금 날리더라도 호화 세계여행을 해볼까도 고민했다. 어떤 여행이든 가족이 함께라면 행복할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가족과 세계여행을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를 검색하고 읽으며 우리도 당장이라도 갈 것 마냥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둘째가 3살이 되던 해에 가자는 결정을 하면서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계획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마냥 즐겁기만 했다.
현실적이지 않은 계획이라도 어찌 되었든 내가 원하는 대로 계획은 세워졌고, 남편은 잔잔하게 동의해주었다. 어쩌면 남편은 이때에도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5년 후에 갈지 안 갈지 5년 후에 생각해보면 되겠지.’
우리는 연도별로 그래프를 그리고,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나이를 적어보았다. 나이를 적다 보니 남편 나이 마흔을 넘겨야 한국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심히 걱정도 되었다. 이제는 30대나 40대나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30대 초반인 나의 상상 속에서는 마흔이 넘으면 폭삭 늙은 중년일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에 여행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안 되겠어. 봐봐. 충기씨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 떠나게 돼. 우리 그냥 둘째 2살 되면 바로 가자.”
“음… 그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아기 아프고 그러면 어떻게 해? 안돼. 안돼.”
모든 걸 받아주던 남편이 갑자기 돌변했다.
“뭐가! 충기씨가 늙어서 못 가면 어떻게 해? 돈문제라도 생기면 젊기라도 한 당신이 설거지라도 해야지.”
사실 나는 나의 계획이 현실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상 계획대로 떠난다고 해도 생각하지 못한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렇기에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편이나 내가 한 살이라도 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 둘째 아이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기가 한 살이든 두 살이든 어느 나라에서도 키울 수 있어. 어차피 사람 사는 세상이잖아. 그런데 충기씨나 내가 폭삭 늙으면 우리의 계획은 아예 무너질지도 몰라. 아기 나이 한 살만 당기자~~ 응? 제발~~”
둘째의 나이는 중요하지도 않고 우리의 건강과 젊음이 중요하다고 계속 설득했다. 이 실랑이는 한 30분이 이어졌고, 남편은 결국 설득당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둘째 아이 2살이 되면 한국을 떠나기로 잠정 합의했다.
결혼과 함께 유학을 가기로 했던 약속을 어긴 남편에게 확답을 받기 위해 사인도 받았다.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협의하고 나니 당장이라도 이루어질 꿈같았다. 유학을 못 가게 만들었던 남편에 대한 미움이 깨끗하게 없어질 정도로 기뻤다.
그 날부터 나의 일기장의 첫 줄은 이 문장으로 채워졌다.
‘2018년 안에 가족과 함께 세계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