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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달 Feb 09. 2017

그래, 지금을 즐겨야 미래도 즐거운 법

낭트 골목길, 피라미드가 있는 케밥집에서 만난 나쎄르의 이야기

낭트는 밤 여덟시에도 환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처럼 하늘은 새파랗고 쨍했다. 열 세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느라 안그래도 시차 감각은 엉망이 된 상태인데 낮밤의 경계가 모호한 그 한낮같은 저녁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캐리어를 호텔 방 안에 던져두고 무작정 나와 포석이 깔린 골목길을 걸으면서 나는 자꾸 헤맸다. 길이 아니라 시간을. 하필이면 시계마저 벗어두고 나와서, 한국 시간으로 몇 시인지도 몰라서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어렴풋이 시간을 추측할 수 있었던 유일한 단서는 내 몸 안에 있는 배꼽시계뿐. 흐릿하게 비냄새가 풍기는 낭트의 길거리에 서서 꼬르륵대며 울어대는 배꼽시계의 호소를 듣고, 그러고보니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아,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구나, 그제야 내가 지금 방황하고 있는 이 시간이 어디쯤인지 대충이나마 알 수 있었다.


내가 낭트에 도착한 건 토요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길가의 가게들은 문을 연 곳이 없었다. 프랑스는 주말에 일을 하지 않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걷다보면 문을 연 식당이 한 군데 쯤은 있겠지, 그리고 걷다보면 바다가 나올 수도 있겠지. 여긴 항구도시라고 하던데. 쓸데없는 생각만 하면서 하염없이 걷는데 어디에도 문을 연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에는 편의점도 없나? 이대로 굶어야 하나? 밥을 못 먹게 된다고 생각했더니 성미 나쁜 허기가 성질 급하게 몰려 들었다. 그림자의 각도가 조금 더 기울었다고 생각하면서 하늘을 보니 슬쩍 밤이 다가오는 낌새가 보이는 것 같아 괜히 불안해졌다.


그 때였다. 자극적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두어 걸음, 바쁘게 걸어 모퉁이를 돌자 사막의 오아시스마냥 불이 켜진 식당이 하나 보였다. 간판에 그려진 촌스러운 케밥 그림이 세상에서 가장 먹음직스럽고, 또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절로 걸음이 바빠졌다. 식당 앞에 서서 멍하니, 유리 문 안을 들여다 보았다. 테이블 서너개, 코카콜라라고 쓰여있는 커다란 냉장고, 손때 묻은 의자들과 한쪽 벽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 그림. 마침 흰머리가 군데군데 섞인 은발을 곱게 틀어올린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숄을 두른 채 카운터 앞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두 문을 닫은 길거리에 홀로 향기와 빛을 뿜어내며 영업 중인 케밥 식당, 거기서 나쎄르 가족을 만났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스터 세트를 만들고 있는 나쎄르, 그리고 문밖에서 그를 지켜보는 그의 아내


영어도 손짓발짓을 더해야만 간신히 의사소통이 되는 상황에서, 프랑스어라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내게 주문은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다. 그나마 오픈 키친 위쪽 메뉴판에 친절하게 사진이 붙어있긴 했지만, 엄… 음…웰…을 반복하며 손짓발짓을 하는 꼬락서니가 혼자 보기도 영 웃기기 짝이 없었다. 되도 않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손짓발짓하다보니 스스로 답답해서 복장이 터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식당 주인은 인내심이 깊었고 아주 친절했으며 심지어 유머 감각까지 있었다. "뭘 고르든 다 마스터 세트로 나갈테니까 걱정말고 주문해도 돼!" 기껏 어렵게 골라서 주문했더니 됐고 자기가 알아서 맛있는 걸로 만들어주겠다며 인심 좋게 웃는 식당 주인이 바로 나쎄르였다.




"어디서 왔어요?"

그래, 웨아 아 유 후롬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지. 나쎄르가 만들어준 버거를 입안으로 욱여넣으며 삼킨 뒤,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에야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아임 프롬 코리아, 사우쓰 코리아." 나쎄르는 껄껄 웃으며 코리안은 처음 만나봤다고 악수를 청했다. 그가 만들어준 프렌치 프라이를 주워먹느라 손에 기름기가 번들거려서 휴지로 슬쩍 손을 닦았다. 나쎄르의 손은 큼지막하고 굳은 살이 잔뜩 배겨있었다.

"웰컴 투 낭뜨, 벗 아임 프롬 이집트, 하하."


이집트에서 온 이민자 나쎄르와 그의 프랑스인 아내, 그리고 아들.


나쎄르는 7년 전 이집트에서 프랑스로 건너왔다고 했다. 배를 타고 프랑스에 왔지, 처음에는 파트타임 잡으로 마트에서 일하기도 했고 부두에서 짐을 나르기도 했어. 그렇게 얘기하면서 나쎄르는 자기 손을 보여줬다. 손바닥 안쪽에는 굳은살과 흉터, 그리고 기름이 튀어서 생긴 물집으로 가득했다. 투자 이민자가 아닌 이상에야 이민자의 삶이란 어디서든 또 누구든 비슷해서, 고생 없이는 어떻게든 자리잡을 수 없는 법이다. 나쎄르의 손은 바로 그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우리 집은 7형제였는데 내가 둘째였어. 집은 좁았는데 사람은 많아서 언제나 바글바글했고. 같이 놀던 친구가 먼저 이민을 갔는데 고생은 좀 하더라도 해볼 만하다고 하길래 나도 프랑스에 왔어. 처음엔 후회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내 가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그 때 나쎄르의 아들이 까르르 웃으며 달려들어왔다. 나쎄르를 닮은 곱슬머리에 진한 갈색 눈, 그리고 나쎄르의 박혀 있었다. 프랑스인 아내를 닮은 하얀 얼굴에는 주근깨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나쎄르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띄우면서 아들을 번쩍 들어올렸다. "이렇게 나 닮은 아들도 있으니까 행복하지."


훈훈한 얘기에 감동받고 있는 나를 버려두고 나쎄르는 아들을 목마 태운 채 그대로 가게를 나가버렸다. 가게 앞 의자에 앉아있던 나쎄르의 아내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나쎄르의 네살짜리 아들은 어느새 그의 등에서 내려와 가게 앞에 내려앉은 비둘기들을 쫓으며 또 숨넘어가게 웃고 있었다. 나쎄르는 아들의 손에 비스킷을 쥐어주며 비둘기들에게 모이처럼 뿌려주는 방법을 알려줬다. 때마침, 아주 타이밍 좋게 길고 긴 낭트의 낮이 끝났고 땅거미가 진 거리에서 미소짓고 있는 나쎄르의 가족은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생각보다 더 양이 많았던 버거를 조금 남기고 나온 나는 나쎄르에게 물었다. 가족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나쎄르도, 그의 아내도 흔쾌히 허락했고 그는 아들을 들어올려 품에 안은 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아들, 나랑 아내를 반반씩 닮아서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지?" 프랑스어로 팔불출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저 마주 웃어주며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나쎄르의 가게 벽면에는 기자의 피라미드 사진이 큼직하게 붙어있다. 나쎄르는 아침에 일어나 아내와 키스를 하고 아들을 꼭 안아준 뒤 자신의 가게에 출근해 문을 열고 청소를 하면서 한번씩 허리를 펴고 피라미드가 그려진 벽을 지그시 바라본다. 화질이 썩 좋지는 않지만 그는 그 피라미드를 보면서 두고 온 고향과 그의 여섯 형제들, 부모님과 이집트의 흙냄새를 떠올린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다시 되새기면서, 그가 지금 발딛고 서있는 이곳을 새삼 실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피라미드를 들여다본 뒤, 나쎄르는 부엌의 가스 버너에 불을 당기면서 콧노래와 함께 나지막히 한 마디를 읊조린다. 저 먼 아시아의 한국에서 낭트까지, 일을 하기 위해 열 세시간을 날아온 나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였던 것처럼, "카르페 디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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