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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달 Mar 29. 2017

공중화장실의 물을 내리지 않고 떠나는 당신에게

닫혀있는 변기 뚜껑이 선사하는 최고의 공포에 대하여


저는 오늘도 변기 앞에 선 채 굳게 닫힌 변기뚜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글머리부터 변기 얘기라니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군요. 하긴, 제목에 화장실이 들어간 순간부터 각오했어야 마땅한 일이지요. 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몇십번, 아니 어쩌면 몇백번이나 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에서 변기 뚜껑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화장실에 왔다는 건 분명 배설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일텐데, 저는 어째서 그 좁은 칸막이 안에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가 놓고는 어째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그저 변기 뚜껑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꾸물꾸물 솟아오르는 요의조차 잊을 정도로 그 하얗고 각진, 어쩌면 둥글거나 긴 변기 뚜껑의 어딘가가 한없이 매력적이라서…일까요?


반대입니다. 저는 이 변기가 너무나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닫혀있는 변기 뚜껑 앞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가만히 서있는 것입니다. 겁이 없고 무덤덤한 편이라 어지간한 공포 영화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저이지만, 이 변기만큼은 참을 수 없이 무섭습니다. 누군가 제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야?"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겁니다. "뚜껑이 닫혀있는 공중화장실의 변기"라고요.


이것은 슈뢰딩거의 변기입니다.


이 변기 안에는 누군가의 배설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변기 안에는 배설물이 아예 없거나, 혹은 명확하게 존재합니다. 배설물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란 불가능합니다(물론 반쯤 흘러가다 잔여물이 남은 상황도 존재할 수 있겠지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러나 그걸 반은 있고 반은 없다는 상태로 정의하는 것은 이상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 변기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그 안에 배설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이 변기가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슈뢰딩거의 난제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 난제를 증명해야하는 위기에 처했는가. 공중 화장실에서 입을 다문 변기와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뼈저린 심경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화장실로 달려와 문을 열고 이 좁은 칸막이 사이로 몸을 밀어넣었을 때, 변기 뚜껑이 닫혀있는 걸 보고 곧바로 돌아나오지 못했을까. 다른 칸에 여유가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조금 더 기다려볼 것을 그랬지. 그러나 그 모든 가정을 뒤로 하고 닫혀있는 변기 앞에 서고 만 저는, 심호흡을 굳게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변기 뚜껑을 들어 올립니다. 부디 이 안에 아무 것도 없기를 바라마지 않으며.



당첨 확률은 50%. 확률은 반반이지만 당첨되지 않았을 때의 타격은 그 내용물(…)의 상태에 따라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오늘은 다행히도 건더기(…) 없는 누군가의 소변 정도였기에 말없이 다시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는 것으로 액땜을 마칩니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깨끗하게 쓸려내려간 뒤에야 변기 뚜껑을 들어올리면서, 어쩐지 하염없이 슬퍼집니다. 타인이 남기고 간 배설물의 자취를 눈으로 목도하는 일이 제 인생에서 이토록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 힘주어 몸안의 잔여물을 배설의 형태로 내보낸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을 내리지도 않고 서둘러 화장실을 떠나고 싶었던 당신의 여유없음과 비겁함이 슬픕니다. 벌써 수십 차례, 이러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저는 늘 고민하게 됩니다. 대체 왜 물을 내리지 않는걸까? 자신이 내보낸 것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욕망일까요?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중화장실 변기의 레버에 묻어있을지도 모르는 불결한 것들을 자신의 손에 묻히고 싶지 않은 이기심일까요? 일을 보고 일어서서 변기 뚜껑을 닫은 뒤 물을 내리는 것을 깜빡하고 만 건망증 때문일까요? 아니면 정말 물 내릴 시간도 없이 달려나갈 수밖에 없도록, 누군가가 당신을 채근했기 때문일까요?


대답 없이 쓸려내려가 하수구 어딘가를 떠돌 당신의 배설물처럼, 제가 던지는 질문들도 이 광활한 인터넷의 바다로 쓸려내려가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이내 사라지고 잊혀지겠지요. 그러나 저는 묻고 싶습니다. 저보다 한 발 앞서 공중화장실을 사용한 당신에게, 배설 후 물을 내리지 않고 변기 뚜껑을 닫은 채  떠나간 당신에게, 그리하여 저에게 공중화장실의 닫혀 있는 변기에 대한 거대한 두려움을 안겨준 당신에게.


저는 당신이 공중화장실의 물을 내리지 않는 이유가,
너무나 궁금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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