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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른달 Mar 02. 2021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백수입니다

아무 계획 없이 회사를 그만둬 보았습니다


사직서를 썼다. 처음 써보는 사직서라 볼펜을 든 채 한참 생각에 잠겼다. 퇴사 이유에 뭐라 적으면 되는 것인가. 선배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일신상의 이유로 퇴사합니다, 이거 한 마디면 끝이지!” 정말 끝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다 검색을 돌려보았다. 직장인들 중 65.7%가 정확한 이유를 숨긴 채 퇴사했다는 기사가 검색에 걸려 나왔다. 머리를 긁적였다. 정확한 이유, 그게 뭐더라.


"퇴사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외치고 다닌 시간은 제법 길었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인들이(대체로 예외없이 모든 직장인들이) 그럴 것이다. 직장인의 꿈은 퇴사라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원래 꿈을 이루는 건 험난한 법이고, 그래서 퇴사는 항상 미래지향적 문장 안에서 살아 숨쉬는 단어일 뿐이었다. 퇴사하고 싶다, 퇴사할 거야, 퇴사할 수 있겠지 등등. 나도 그랬다. 지난 3년 여 간 내 입버릇은 나 곧 퇴사한다, 였다. 그렇게 중얼대는 사이에 보다 구체적인 계획도 생겼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이 끝난 뒤에 퇴사할 거야!”


퇴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얘기하면서 기준점을 도쿄 올림픽으로 잡은 이유는 내가 스포츠 기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고 많은 대회 중에 하필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퇴사의 마지노선으로 삼은 이유 역시 명확했다. 풋내기 스포츠 기자로 시작해서 그럭저럭 경력을 쌓으며 살아왔고 운 좋게 제법 굵직한 대회들도 취재했지만 나는 내가 이 일을 10년 이상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업계 10년차, 주니어 시절은 진즉 끝났지만 그렇다고 시니어가 될 자신은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통기한은 2020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10년차가 되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다. 업계 9년차에 접어든 해에, 내가 직접 취재해보지 못한 유일한 메가 이벤트 국제 대회인 올림픽이 열리고 그것도 도쿄에서 열리는 덕분에 변수가 없다면 내가 쿼터를 받게 될 거란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기가 막힌 행운이었다. 어찌나 앞뒤가 들어맞는지, 꼭 내 마지막을 위해 안배된 시나리오 같았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2019년의 마지막을 보내고 2020년의 첫날을 맞이하던 1년 전만 해도 나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새로운 전염병 소식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괴담처럼 떠도는 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를 미칠 것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코로나19)라는 이름을 가진 그 병이 전세계를 덮치고, 미적거리던 세계보건기구(WHO)가 기어코 팬데믹을 선언하면서 나는 기사를 두들기다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올림픽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내 퇴사는?


고민의 시간은 그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고민 역시 시작과 끝은 짧다. 중간이 길 뿐이다. 내 최후의 보루이자 퇴사로 가는 지도의 마지막 이정표 같았던 2020년 도쿄 올림픽이 끝내 사상 초유의 연기 사태를 맞이한 지난해 3월부터 나는 동력을 잃고 서서히 느려진 기차처럼 조금씩 멈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나는 손발을 묶인 상태로 노트북 앞에 앉아 다음날 , 아니 당장 오늘 쓸 기사를 쥐어짜내야 하는 상황이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고통이 평이한 일상처럼 되어버린 순간, 나는 오랫동안 끌어왔던 이 고민에 마침표를 찍기로 결정했다. 그래, 그만 두자. 그만 둔 후의 대책? 그런 건 당연히 없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없다. 퇴사하겠다고 직속 선배에게 선언하고, 팀장과 국장을 거쳐 본부장까지 훑은 뒤 남은 연차를 모두 소진하고 끝내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지난 한 달 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친 지금, 2021년 3월 2일부로 나는 본격적인 백수가 됐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한계를 맞이한 어느 직장인 하나가 대책 없이 일을 그만두고 살아가는 이야기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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