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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Jan 16. 2019

시리아 축구로 읽는 연극, '더 헬멧'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에서도 '룸 알레포'

여기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배경은 시리아, 무대는 '빅룸'과 '스몰룸'으로 나뉜다. 2월 27일까지 세종 S시어터에서 공연하는 The Helmet(더 헬멧)-vol.1의 룸 알레포가 이 이야기의 베이스로, 지금 쓸 글은 시리아 축구대표팀과 오마르 알 소마에 대한 얘기다. 연극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무슨 축구냐고? 룸 알레포에서 축구는 아주 중요한 소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글에는 연극 더 헬멧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Room Big : 시리아 축구대표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보다 5시간 느린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 알 아인의 셰이크 칼리파 국제 경기장에선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B조 3차전 호주와 시리아의 경기가 전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앞서 1, 2차전에서 1무1패를 당한 시리아는 오늘 이 경기에서 승리해야만 1승1무1패가 돼 와일드카드 16강 진출을 노려볼 수 있다. 물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조별리그에서 주춤하긴 했어도 호주는 이 대회 디펜딩 챔피언이고 객관적인 전력을 놓고 봐도 시리아에 패할 만한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아 축구대표팀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적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74위.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우리나라와 한 조였고-그래서 스몰 룸에선 소마가 한국전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 내전 때문에 엉망인 상황에서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으나 지금 싸우고 있는 호주에 패해 월드컵 본선 진출권 획득에 실패한 팀. 강팀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약팀으로 분류하기에도 어딘지 애매한 팀. 명확하게 설명하기엔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나 없기에 언제나 시리아를 설명할 때는 그들이 처한 내전의 아픔이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는 팀. 그게 바로 시리아다. 



하지만 시리아 사람들은 모두 축구를 좋아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열기만큼은 종주국인 영국이나 삼바축구의 나라 브라질에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폐허 속에서 바람빠진 공으로 드리블을 하는 꼬마들과 내전으로 황폐해진 상황에서도 핸드폰을 붙잡고 어떻게든 최종예선 경기를 보지 못해 안달난 어른들 모두, 해맑은 얼굴로 "시리아 사람들은 모두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연극 더 헬멧-룸 알레포 초반부, 반군들의 주둔지 알레포*에 잠입한 아사드 정부군 소속 마흐무드 역시 그렇게 말한다. "시리아 사람 중에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니?" 


▶Room Small : 오마르 알 소마


시리아 알레포에 사는 꼬마, 위험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에 한껏 뾰루퉁해진 꼬마는 이웃집 벽에 대고 공을 차는 게 취미다. 어떤 아저씨가 이사오기 전까진 옆집이 비어있어 아무리 공을 차도 뭐라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하루 전에 이사온 아저씨는 시끄럽다고 나가서 공을 차라고 소리를 지른다. 꼬마는 외로워서 이웃집 문을 두드린다. 이런 저런 핑계처럼 말을 이어가보지만 아저씨는 꼬마가 귀찮기만 하다. 분명히 벽 너머로 축구 중계소리를 들었는데, 아저씨와 함께 축구를 하고 싶은데 아저씨는 요지부동이다. 시무룩해진 꼬마에게 한풀 꺾인 목소리로 아저씨는 말한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놀아라, 오늘은" 꼬마는 되묻는다. "내일은 밖에 나가서 축구해도 되냐"고. 아저씨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건 부모님에게 물어보라고 우물거린 뒤 꼬마에게 스니커즈를 건넨다. 꼬마는 몰랐지만, 그 아저씨의 이름은 마흐무드다. 달콤한 초콜렛 바에 신난 꼬마가 한 입쯤 씹어삼켰을 때, 익숙한 소리가 꼬마네 집이 있는 건물을 덮쳤다. 굉음, 무언가 무너지고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어둠이다.


꼬마의 이름은 소마다. 시리아 축구대표팀 부동의 에이스, 오마르 알 소마와 같은 이름이다.


▶Room Big : 시리아 축구대표팀


시리아 내전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국제정치에 대해 문외한이고 국제부나 정치부를 경험해본 적도 없는 내가 뭐라고 말을 보태는 것은 오만하고 피상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저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중동 민주화 시위가 시리아 내전의 바탕이 됐고 하페즈 알 아사드부터 현재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까지 이어진 아사드 정권의 장기집권이 불씨를 틔웠으며 알라위파 무슬림의 수니파 무슬림에 대한 강경 통제가 촉매가 됐다는 것 정도, 그리고 2010년부터 내전이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 정도다. 종전이 없는 현재진행형의 내전은 주변 국가와 친아사드 세력 그리고 반아사드 세력까지 확대되고 있지만 당연하게도 가장 큰 피해자는 시리아 국민들이라는 점까지 더해서.



축구를 좋아하는 시리아 국민들 중 35만 명이 넘는 인구가 희생됐다. 내전에 시달린 8년, 불과 8년 동안 35만 명이다. 죽지 않은 자들의 신세가 더 낫다고 얘기하긴 어렵다. 언제 날아들 지 모르는 공습에 떨면서 살아가거나, 살아온 집과 터전을 버리고 난민이 되어 떠도는 신세의 시리아인들은 더욱 많다. 아사드 정권이 유지되는 한 시리아 내전이 끝나긴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폐허가 된 도시, 어제 멀쩡하게 버티고 있던 건물이 무너지고 불바다가 되고 피로한 얼굴로 웃으며 헤어졌던 이웃을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상황들 속에서 시리아 사람들은 그래도 축구를 본다. 시리아의 '독수리들(Qasioun)'이 두 날개를 펼쳐 시원하게 날아오를 것을 기대하며. 그리고 축구 앞에선 정부군도 반군도 없다. 더 헬멧의 배경인 2017년 시리아 알레포에서 축구 중계를 보지 못해 속상해하던 화이트 헬멧, 마흐무드, 그리고 소마처럼.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의 결과를 알고 있는 2019년의 나는 더 헬멧-룸 알레포가 시작된 순간부터 독수리들이 국민들에게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의 기쁨을 안겨주지 못했다는 새드엔딩을 마음에 품고 극을 지켜봐야했다. 더 헬멧-룸 알레포를 관통하는 소재인 축구가 예견하고 있는 이 비극의 향기를, 좁고 축축한 세종 S시어터의 체향과 겹쳐 맡으며면서. 그러나 내전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완벽하게 역설적으로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리아 축구대표팀은 내 생각과 달리 그들에게 여전히 희망이었다. 


▶Room Small : 오마르 알 소마


빅룸과 스몰룸으로 나뉘어 진행되는 독특한 구조의 이 연극은 자살 폭탄테러를 하려던 마흐무드, 그리고 심심함에 공을 차던 꼬마 소마가 있는 건물이 공습으로 무너지면서 공간적으로 변화한다. 무대의 중앙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벽 하나에 소마의 공간과 마흐무드가 있던 공간이 나뉘고, 같으면서 다른 얘기가 시작된다. 스몰룸의 주인공은 축구를 좋아하는 꼬마, 소마다. 그에겐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빠가 있고 사랑스러운 동생 이브라힘이 있고 함께 축구를 하던 동네 친구들이 있다. 내전 속에서도 공을 찰 수 있는 공간, 함께 공을 찰 수 있는 친구들만 있다면 소마는 행복하다. 그러나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 친구들은 하나 둘 집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고, 아예 시리아를 떠나는 친구들도 생겼다. 혼자 공을 차면서도 소마는 언젠가 시리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될 날을 꿈꾼다. 자신의 이름, 소마와 같은 대표팀의 에이스 오마르 알 소마... 그리고 전쟁을 멈춘 사나이 디디에 드록바처럼 멋진 축구선수가 되는 게 그의 꿈이다.



오마르 알 소마는 독수리들의 심장과 같은 선수다. 시리아 내전 이후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로 팀을 옮기며 사실상 시리아 리그에서 뛴 시간은 적지만(물론 시리아 리그 자체가 중단된 탓이 크지만) 오마르 알 소마는 시리아 국민들의 자랑이었고 지금도 자랑이다. 물론 그가 늘 시리아의 심장이었던 건 아니다. A대표팀 데뷔 무대였던 서아시아 축구 선수권대회 결승, 이라크를 꺾고 우승한 시리아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기쁨에 젖어있을 때 오마르 알 소마는 홀로 관중석으로 걸어가 반정부군 지지 관중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FIFA가 정치적인 의미의 세리머니를 금지한 것과 별개로, 아사드 정권이 오마르 알 소마의 이런 괘씸한 세리머니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오마르 알 소마는 그 뒤로 대표팀에 복귀하지 못했고 시리아 축구대표팀은 추락을 거듭했다. 시리아에서 퇴출당한 오마르 알 소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귀화 제의를 받았고, 결국 그의 필요성을 깨달은 아사드 정권이 복귀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의 커리어에 남은 대표팀 공백 5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Room Big : 시리아 축구대표팀


스몰룸에 소마가 있다면 빅룸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카림의 아들 키파가 있다. 키파 역시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꼬마였지만 공습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아이러니컬한 건 키파의 아버지 카림이 시리아의 민간 구조대 '화이트 헬멧'의 일원이라는 점. 남을 구하느라 아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속에서 카림은 자신이 내다버렸던 키파의 축구공과 비싼 축구공 대신 사줬던 싸구려 비누방울 장난감의 환상을 본다. 그래서 카림에게 축구와 축구공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다(키파는 화이트 헬멧 중 가장 유명한 구조대원 '아부 키파'와 이름이 같다. 아부 키파는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에서 2시간 동안 구조작업을 펼쳐 생후 2개월된 여자아이를 구한 영웅이지만, 1년 뒤 괴한들의 습격에 스물 세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생후 2개월 된 여자아이를 구해낸 아부 키파


반군에 대한 극심한 증오, 그리고 시리아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한 화이트 헬멧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자살테러를 감행하려던 마흐무드를 멈춘 건 바로 키파와 소마다. 죽은 키파, 마흐무드의 복수심의 근원이었던 그의 죽은 아들,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소마. 축구를 좋아하던 세 아이는 어른들의 본능적인 양심과 죄책감을 자극하는 '딸깍' 버튼이다. 형제가 싸우면 빨리 잠이나 라며 스위치를 딸깍 내리던 화이트 헬멧 대장 칼리드의 어머니처럼 축구와 아이는 어른들의 싸움을 소강시키는 버튼이다. 그렇다. 축구로 전쟁을 멈춘 디디에 드록바처럼, 축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Room Small : 오마르 알 소마


그들이 싸움을 벌일 때 스몰룸의 소마는 디디에 드록바의 얘기를 한다. 소마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드록바다. 소마가 드록바를 좋아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전쟁을 멈춘 사나이, 디디에 드록바!" 코트디부아르 내전이 한창이던 2005년, 바로 다음해 열리는 2006 독일 월드컵 아프리카 지역예선에서 코트디부아르를 본선으로 이끄는 결승골을 터뜨린 드록바는 TV 생중계 중인 카메라 앞에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국민들이여, 우리 부디 잠시 일주일 만이라도 전쟁을 멈춥시다"라고 호소했다. 놀랍게도 드록바의 호소는 정말로 북부 반군과 남부 정부군을 모두 멈추게 만들었고, 2년 뒤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은 끝났다.



소마가 자신과 이름이 같은 시리아 최고의 영웅 오마르 알 소마가 아니라 드록바의 이름을 댄 건 더 헬멧-룸 알레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닿아있다. 소마의 아버지는 때묻은 첼시 레플리카에 마커로 드록바의 이름과 백넘버를 써서 선물하고 소마는 이 옷을 입고 공습으로 매몰된 상황에서 환상을 보며 버텨낸다. 그래도 소마는 시리아 축구를 좋아했고, 환상에서 만난 키파에게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과 경기에서 오마르 알 소마가 터뜨린 극적 동점골을 설명하며 환하게 웃는다. 


소마는 드록바가 아니다. 소마의 꿈은 드록바처럼 내전을 멈추는 축구선수가 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소마는 드록바가 아니고, 소마의 꿈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무사히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는 것. 드록바가 되기 위해선 먼저 어른이 되어야 한다. 시리아 소년의 꿈은 그런 단계를 밟을 수밖에 없다. 살아남아야, 어른이 되어야, 축구선수가 될 수 있다.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묻는 소마의 모습에서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에 복귀해 내전에 고통받는 시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던 오마르 알 소마가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흘리던 눈물이 생각났다.


알레포에서 축구를 하는 시리아 소년들


▶그리고 룸 알레포


지금 막 2019 아시안컵 호주와 시리아의 경기가 끝났다. 결과는 3-2 호주의 승리. 동시에 치러진 B조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의 경기가 0-0 무승부로 끝나면서 시리아는 조 4위로 밀려났다. 와일드카드 자격은 각조 3위 중 4개 팀에만 돌아가기 때문에 시리아의 본선 진출은 이날 패배로 완벽하게 무산됐다. 2-1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극적 페널티킥을 성공시킨 뒤 세리머니할 시간도 없이 공을 껴안고 뛰어가던 오마르 알 소마는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라운드에 대자로 드러누워 눈물을 쏟았다. 월드컵에 이어 아시안컵까지, 또 한 번 시리아를 외면한 토너먼트의 신이 비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리아는 포기하지 않는다. 산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를 꺼내는  일이 더 많은 화이트 헬멧도, 아사드의 개라는 비아냥 속에서 반군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내놓고 대치하고 있는 마흐무드와 같은 정부군도, 그에 맞서는 반군도, 그리고 소마와 키파도. 한없이 평화로운 것처럼만 느껴지는 21세기, 어느 땅에선 아직도 폭격과 공습이 계속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 그들은 끊임없이 메시지를 발산한다. 우리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살아있다. 슈크란, 인샬라. 신은 강하다. 그리고


"시리아 사람 중에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니?"


라고.



*사실 알레포는 2016년 12월을 끝으로 시리아 정부군(아사드군)에게 완전히 장악됐다.

**시리아 내전과 축구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깊게 읽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BBC 르포 기사를 링크한다. https://www.bbc.co.uk/news/resources/idt-sh/syria_football_on_the_front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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