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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Apr 03. 2023

1년에 한 번, 봉개동을 갑니다

2021년 4월 3일, 그리고 앞으로 매년 4월 3일을 기억하기

매년 달력을 새로 꺼낼 때마다, 까먹지 않기 위해 표시해두는 날들이 있다. 주로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들-가령 덕질 같은-을 적어두는데, 4월에는 그렇게 표시해둔 날짜가 꼭 3개가 있다. 4월 1일, 4월 3일, 4월 10일.


4월 10일은 내 찬란하고 소박한 덕질의 역사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것이고, 따지고 보면 4월 1일도 비슷하다. 20년 전 그날부터 나는 매년 4월 1일에 장국영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으니까. 아마 이 부분은 장국영을 사랑했던, 사랑하는, 어쩌면 앞으로도 사랑할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짊어지고 갈 운명이기도 할 것이고.


그리고 4월 3일이 있다.


불과 7~8년 전까지만 해도, 4월 3일에 조그맣게 표시해 둔 달력을 보거나 아니면 스마트폰 캘린더 앱의 위젯에 체크 표시가 되어 있는 걸 본 사람들 중 이날이 무슨 날인지 바로 떠올려 내게 물어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드물게 몇몇 정도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향이 제주도인가요?"라고 물어봤을 뿐.


물론 나는 제주도 출신이 아니다. 내 고향은 서울이며 나는 제주도에 그 어떤 연도 없는 평범한 육지 사람이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제주도라고 하면 여행지를 먼저 떠올리던 그런 육지 사람. 늦봄 무렵 제주도에 가면 왜 사방에 동백꽃 그림이 있는지, 올레길을 걷다가 종종 마주하는 어떤 비극의 유적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무심했던 육지 사람.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4월 3일의 의미를 알고, 4월 3일을 챙기게 된 육지 사람이다.


내가 제주 4·3을 처음 알게 된 건 생각보다 꽤 예전이었다. 당시 활동하던 소설 창작 사이트가 있었는데, 운영자가 부산 분이라 부산에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워크샵이라고 해야 할지, 엠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들 A4 1~2페이지 정도로 엽편을 써와서 낭독하고 술마시고, 대충 그런 모임이었다. 부산역에서 내려 해운대를 지나가는 빨간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까무룩 까무룩 졸아가면서 송정해수욕장에 도착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신입생 OT라도 온 것마냥, 바닷가 근처 낡고 허름한 펜션(말이 좋아 펜션이지 사실 민박에 가까운)을 빌려 장을 본 것들을 정리해놓고 술을 냉장고에 욱여넣고, 이불을 대충 깔고 그 위로 굴러다니면서 깔깔대다가 술 한 잔 곁들여가며 서로의 미성숙한, 그래서 매끈하게 잘 빠진 글들과는 또 다른 투박한 맛이 나는 날것의 이야기들을 육사시미 한 점씩 집어먹듯 삼키곤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내가 뭔가에 홀린 듯이 썼던, A4 1장 반 짜리 원고의 제목도. 그때까지 제주에 어떤 연고도 없고, 심지어 제주도 여행도 거의 가지 않았던 내가 부산에서 낭독한 A4 1장 반짜리 원고의 제목은 「유채꽃반디」였다.


사람 타는 냄새가 즐비했다. 오라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여나 타는 것들 중 오라방이 있을까봐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꺽꺽 숨 삼키는 소리는 침 뭍은 입술 사이로 바람처럼 픽픽 새어나올 뿐이다. 유채가 한들거리는 사이로 등을 둥글게 말고 엎드려 있은 지도 벌써 하룻밤이 꼴딱 지났다. 무릎이 아리고 허리가 쑤셔왔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저 먼 산 어드메선 아직도 빵빵 총 쏘는 소리가 나고 사람 타는 냄새가 여기까지 흐물흐물 기어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엉큼 자란 유채꽃밭에 괭이처럼 몸을 말고 엎드려 숨만 히끅히끅 삼켜가며 오라방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지금 다시 보니까 정말 엉망진창이 아닐 수 없다. 차마 고치거나 더 쓰려고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글 중 하나인데, 내게 이 짤막하게 남은 글뭉치 한 조각이 각별한 이유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에, 4·3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내가 왜 4·3을 소재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나는 그때 정말 뭐에 홀린 상태로 이 글을 썼고… 그리고 한동안 이 글 자체를 잊었다가 2017년부터 제주도를 찾아다니면서 오름을 오르고, 4·3 유적지를 찾아다니고, 다크투어를 시작하며 점점 더 4·3을 생각하게 됐다. 생각하고 있다.


하물며 올해는, 한 달 살기라는 짧은 형식으로나마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상태에서 맞이하는 첫 4·3이다. 그래서 이 무렵에 맞춰 제주도를 찾은 친구 MJ와 함께, 하루 전인 4월 2일 너븐숭이 애기무덤과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는 북촌리를 먼저 갔다가 봉개동으로 넘어왔다.

북촌리는 <순이삼촌>의 배경이 된 곳으로 처음 접했다. 그래서 너븐숭이 애기무덤 뒤쪽 큰길가로 가면 무덤 비석들과 함께 군데군데 <순이삼촌>의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나는 그 가운데 오도카니 서서 제주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슬픈 냄새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나의 위선에 대해 생각한다.


애기무덤을 볼 때마다 차마 말로 꺼낼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북받쳐 올라와 입술을 짓이겨 씹으며 가만히 바람개비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 제주도에 갈 때마다 초콜릿이나 사탕 따위를 사서 너븐숭이 애기무덤 곳곳에 놓아두고 오는 일. 이건 모두 과거를 모르고 현재에 살고 있는 나의 위선이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내가 이렇게 그때의 일을 알고, 뒤늦게나마 기억하고, 이렇게 쓰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이 담긴 위선이다.


그래서 나는 너븐숭이를 떠나 MJ를 데리고 봉개동으로 간 것이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봉개동에 있다.

너븐숭이 기념관에서 조금 더 내려와 중산간동로를 타고 한화리조트 방면으로 기십여 분 달리면 봉개동 제주 4·3 평화공원이 나온다. 제법 넓은 부지 안은 모두 이대로는 잊혀질 수 없다는 비탄과 잊혀지고 있다는 슬픔으로 가득 차있고, 그래서인지 언제 가도 유독 안개가 자주 끼는 것만 같은 곳이다.


제주 4·3 다크투어를 위해 처음 봉개동을 찾아왔던 2017년 초여름 이후, 나는 꾸준히 이곳을 찾아 같은 전시를 계속 보고, 4·3의 역사에 대해 쓰여진 같은 내용을 계속 읽고, 4·3의 피해를 말하는 생존자-였던 이들-의 같은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이곳에 처음 온 MJ는 평화기념관을 한 바퀴 도는 내내 말이 없었다. 책에서 읽은 4·3의 이야기도 물론 비극적이지만, 앞뒤가 숭덩숭덩 잘라내진 채 최대한 간결하게 압축된 어떤 '잘려나간 역사'의 한 덩어리가 아닌, 이곳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경악하고 느끼며 체감하는 비극적인 역사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경험은 우리를 그렇게 숙연하게 만들고 만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와서 내가 MJ에게 한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나는 내가 이렇게 끔찍한 사실을 스무해도 넘게 모르고 살았다는 게 가장 끔찍한 것 같아." 엄밀히 말하면 스무해도 훨씬 넘게 모르고 살았지. 말하면서 씁쓸함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잊기란 너무나도 쉬운데, 잊혀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왜 피해자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씁쓸함. 그 씁쓸함이 73년 전-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의 기준으로는 75년 전-이 섬에서 살던 이들이 겪은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다독여주지 못한다 치더라도, 이마저 나의 위선이라 할지라도 나는 꾸준히 꾸준히 봉개동을 찾고, 꾸준히 더 많은 이들과 제주 4·3을 이야기할 것이다. 오직 그런 다짐만을 봉개동에 다시 한 번 남겨두고서 걸어나오는 길은 유달리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봉개동에는 이름 없는 비석 하나가 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내 '역사의 동굴'이라 이름 붙은 전시실 안쪽에 누워있는 이름 없는 하얀 비석은 '백비(白碑·Unnamed Monument)'라고 불린다. 백비에 이름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은 여럿 있을 수 있겠으나, 설명보다 중요한 것은 백비에 어떤 이름을 어떻게 새겨 일으켜 세울 것이냐다. '언젠가 이 비석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그 말처럼, 결코 잊혀지지 않는 역사이자 온전히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슬픔의 기록으로 이 아름다운 섬을 끌어 안아야만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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