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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Mar 30. 2023

제주도에는 오름이 몇 개나 있을까?

2021년 3월 18일, 꽃 보러 갔다가 처음 만난 따라비오름

운동 부족이 올레길 1코스를 완주한 대가는 혹독했다. 약 17km를 걷고 또 걸은 후유증은 잠에서 깨어 침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전신을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내게 찾아왔다. 은은한 통증을 호소하는 정강이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 방바닥을 딛자마자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꿰뚫는 찌릿한 통증에 순간 나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충 아침을 때운 다음 옥상으로 올라가 스트레칭이라는 걸 다 했다. 서울에서라면 이런 거 절대 안 했을 텐데, 궁시렁거리며 옥상문을 열고 올라가 저 멀리 보이는 새섬과 문섬의 풍경을 바라보며 팔다리를 쭉쭉 사방으로 내뻗었다. 하늘이 쾌청하고 눈앞의 바다가 맑아서 오늘 날씨가 좋겠구나 싶어 흐뭇한 마음도 잠시, 겨우 10분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흐악, 허윽, 으악, 오만 가지 신음이 다채롭게도 쏟아졌다.


오션뷰다 오션뷰


누가 들으면 사람 하나 죽어가는 중인가 의심했을 만큼 수상쩍은 신음을 내뱉으며 종아리에 배긴 알을 풀어준 뒤, 아무 옷이나 대충 걸쳐입고 흐느적거리며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올레길 후폭풍에 시달리느라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몸뚱이를 처박고 싶었지만, 금요일부터 제주도에 비 예보가 있어서 혹시라도 꽃이 다 떨어질까봐 오늘 유채꽃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올라오자 나보다 훨씬 멀쩡하고 건강해보이는 배언니가 개운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배언니를 태우고 서귀포 중앙로터리를 지나 표선 쪽을 향해 시원하게 달려나갔다. 제주시, 특히 연동이나 아라동, 노형동 쪽은 서울 못지않게 차가 많지만 서귀포는 그렇지 않다. 저녁 무렵 관광객과 도민들의 차가 뒤섞여 회전교차로가 제법 붐비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느 길을 달려도 큰 정체 없이 수월하게 차를 움직일 수 있었다. 서울의 지독한 교통체증에 지쳐있던 내게 제주도에서 하는 운전은, 제주도의 구석구석 배어있는 아름다움만큼이나 커다란 힐링이 되어주었다. 물론, 입도 일주일이 지난 뒤부터는 극도의 경계심을 갖추고 방어운전 하는 데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날의 목적지는 가시리였다. 제주도 한 달 살기 선배인 문사장이 알려준 숨은 꽃구경 명소가 있는 곳이다. 마침 하늘은 맑고, 섬 중간의 한라산은 머리까지 아주 또렷하게 잘 보이는 날씨였다. 정상 근처에 희미하게 남은 하얀색 얼룩을 보면서 한라산 등반은 역시 막바지로 미뤄야겠다 생각하는 동안 차는 달리고 달려 표선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순간, 나와 배언니의 입에서 감탄사가 먼저 터져나왔다.


표선면 가시리 녹산로의 아름다운 풍경, 아직 벚꽃이 완전히 만개하진 않았음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길


유채가 흐드러지게 핀 길가 곳곳에 사람들이 차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푸르게 펼쳐진 하늘과 새하얀 구름, 그 아래 움트기 시작한 벚꽃들과 샛노란 유채꽃의 조화는 현실감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림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이 찬란한 대비에 결국 우리도 차를 잠시 세우고 사진을 좀 찍다가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누르며 다시 차를 몰았다. 사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문사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문사장이 추천해준 곳이니 어련히 예쁠까 싶어 무작정 달려간 것뿐. 그래서 주차장에 들어서 차를 세우고 내린 순간 다시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이건, 너무 예쁜데.



문사장이 알려준 장소는 가시리 풍력발전소였다. 산 중턱 너른 벌판에 드문드문 서 있는 풍력발전기 아래로 드넓은 유채밭이 펼쳐져 있는 풍경은 비현실적인 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어린 아이가 노란색 크레파스 하나만 들고 명암 없이 칠해놓은 것처럼 샛노란 꽃들의 향연.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에 더해 곳곳에 서있는 바람개비 같은 풍력발전기들. 뭐 하나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이 초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에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사람들이 봄만 되면 유채꽃이 피었다고 제주도로 몰려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던 예전의 나를 앉혀놓고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름다움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보러 올 가치가 있는 풍경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바림 하나 없이 샛노란 풍경이 상징하는 봄을 끌어안는 기쁨이었다.

유채꽃을 만끽한 뒤에는 오름을 하나 오르러 갔다. 오름의 이름은 따라비오름. 가시리 풍력발전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오름이며, 무난히 산책하기에 좋고 풍경도 예쁘다고 문사장이 강력하게 추천한 곳이었다. 이미 문사장이 알려준 가시리 풍력발전소에 대한 만족도가 하늘까지 치솟은 상황이라, 당연히 그가 추천한 오름 역시 끝내주게 좋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따라비오름을 향하는 우리의 발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물론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희미한 전신 근육통에 시달리면서 오름이라니 네가 제정신이냐? 같은 내면의 목소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차피 내일 하루 팽팽 놀며 쉴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틀 운동하고 하루 쉬는 것으로 근육의 초회복을 달성해보자-같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리고 따라비오름은 운동부족 육지사람의 다소 무모한 결정에 아름다운 풍광으로 대답해줄 줄 아는 멋쟁이였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알게 된 나이키 런 클럽 앱을 켜고 오전 운동 느낌으로 오름 둘레길을 걷는데, 흙이 발바닥을 단단히 받쳐주면서도 부드럽게 밀어준 덕분에 알배긴 다리도 힘을 얻었는지 꽤 씩씩하게 나갈 수 있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둘레길을 따라,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거름 냄새와 바람에 묻어나는 희미한 바다 냄새를 느끼며 한 15분쯤 걷자 조금 경사진 오름 등선이 나타났다. 살짝 헉헉대면서도 꾸역꾸역 올라가자 등장하는 팻말. 정상인가? 정상이겠지?


정상이 아니구나!


굼부리(분화구) 세 개가 서로 이어져있는 따라비오름은 봉우리만 여섯 개나 되는 제법 큼직한 오름이다. 내가 올라온 봉우리는 정상으로 가는 길목이었을 뿐. 그러나 그 봉우리에 서서 바라본 오름의 능선은 하나같이 수려해 벌써부터 마음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일부러 그리려고 해도 잘 안될 것 같은 완만한 곡선이 예뻐서 망연히 보고 있자니 문득 이름의 뜻이 궁금해졌다. 따라비, 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땐 따개비가 떠올랐는데, 찾아보니 근처에 있는 새끼오름, 모지(며느리)오름과 장자(손자)오름을 거느린 형국이라 땅할애애비라는 뜻의 따애비에서 파생된 이름이라는 설이 나왔다. 따라비오름을 검색하면 흔히 '오름의 여왕'이라고 부른다는데 정작 이름은 땅할애비네.


어제 성산 일출봉의 계단 지옥에 비하면 따라비오름의 막판 경사도 웃으며 걸어 올라갈만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숨이 차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여전히 헐떡거리면서도 성큼성큼 걸어 정상에 도착한 뒤 둘러보는 풍경은 새삼스럽게도 아름다웠다. 다 올라온 뒤의 만족감 역시 마찬가지였고. 저 앞에 보이는 나무 많은 오름이 바로 모지오름. 정상에 설치된 평상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주변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땀을 식히는데, 바람이 마침 기가 막히게 불어왔다. 여기가 극락이구나. 문득, 제주도에서 처음 올랐던 오름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제주도에서 처음 오름에 올라간 건 2019년의 늦겨울, 혹은 초봄이었다. 연차를 제대로 쓰지도 못한 상태에서 도저히 해외를 나갈 여력은 되지 않고, 하지만 일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2박3일로 혼자 제주도에 내려왔던 때. 하지만 첫날엔 비가 왔고, 둘째날은 안개가 끼고, 마지막 날은 진눈깨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 뺨을 후려갈기는 매서운 바람에 정신없이 얻어맞느라 뭐하고 돌아다녔는지 기억도 희미한 그런 여행이었다. 그 여행길의 마지막 날, 평화로를 타고 공항으로 가던 길에 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새별오름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새별오름을 올려다보던 때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서늘하고 축축하고,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우울한 날씨와 민둥하니 제 살을 다 내보인 채 나를 굽어 내려보던 새별오름의 전경. 그 전까지 산은커녕 언덕 오르는 것조차 싫어했던 나인데 그 순간, 정말이지 뭐에 홀린 것마냥 새별오름에 올라가는 길로 걸음을 옮겼더랬다. 


새별오름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가팔랐다. 흙계단 헛디딜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초보자 코스라던데 이게 정말 초보자 코스가 맞나? 다들 이렇게 가파른 산을 쉽게 쉽게 올라간다고? 여러 가지 의문에 휩싸인 채 뒤를 돌아보니 그새 제법 고도가 높아져 아래가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굴러 떨어지면 꽤 아프겠는데. 돌아서서 내려가기는 아깝고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그런 심정으로 꾸역꾸역 새별오름 정상까지 거의 네발로 기어 올라갔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크게 부풀었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던 흉곽이 겨우 안정을 찾고 색색대는 숨소리도 가라앉았을 무렵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입을 열어 "야-호" 대신 "아아아악!"하고 의미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기 위해서였다. 힘겹게 오른 새별오름의 정상이 내게 보여준 것은 주변에 광활히 펼쳐진 제주 서쪽의 풍경만이 아니었다. 녹음 하나 없이 휑한 2말3초의 민둥산이라 미안하다는 듯, 떠나는 날까지 이런 우중충한 날씨여서 미안하다는 듯, 새별오름과 제주의 날씨가 합작해서 내게 보내준 것은 선명하게 시각화되고 서늘하게 촉각화된 안개의 행렬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안개가 정상에 선 내 몸을 휘감아 촉촉하게 적시고 흩어져 흘러가기를 반복하는 사이, 나는 이유 모를 고양감에 어쩔 줄 모르며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그리고 내 발 아래로 뻗어 나가는 땅의 풍경을 바라보며 자꾸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의 기억이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불현듯 떠올랐다. 그 새별오름 정상의 기억 이후, 나는 제주도에 올 때마다 최소 한 개 이상의 오름을 찾아가게 됐다. 용눈이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 같은 오름들을 찾아다니며 차마 등산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짧은 고행 끝에 마주하는 제주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내 여행에 스스로 선물하는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따라비오름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문득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제주도에는, 오름이 몇 개나 있을까? 나는 얼마나 더 제주에 와야, 제주에 있는 오름을 다 올라가 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 스마트폰 속에 있을 테지만-검색한 결과, 제주 전역의 오름은 360여 개로 추정된다고 한다-내가 바란 것은 명확한 숫자가 아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올바른 답은 희열이었다. 그 오름들을 다 올라가 볼 때까지, 제주를 계속 찾게 될 거라는 확신이 안겨주는, 아주 소박한 희열.


*오름:제주도 한라산 기슭에 분포하는 소형 화산체. 기생화산·측화산. 
오름은 지형학적으로 단성화산(單性火山)의 한 유형으로서 대부분 화산쇄설구(火山碎屑丘, pyroclastic cone) 즉 분석구(噴石丘, cinder cone)에 해당된다. 한라산과의 관계에서 기생화산, 측화산이라고도 한다. 분석구는 폭발식 분화에 의해 방출된 화산쇄설물이 분화구를 중심으로 쌓여서 생긴 원추형의 작은 화산체이다. 주로 현무암질 스코리아(scoria)로 이루어졌으며 높이는 대개 50m 내외이다. 스코리아는 다공질(多孔質)의 화산쇄설물로서 제주도 말로는 ‘송이’라고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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