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밋너 Mar 06. 2023

일출봉은 애국가 화면에서 본 게 전부였는데

2021년 3월 17일, 입도 3일 만에 갓 태어난 아기 기린이 되었어요

올레길 걷기는 대체로 아무 계획 없이 내려온 배언니와 내가 글쓰기에 이어 유이(有ニ)하게 갖고 있는목표였다. 하지만 올레길 유경험자에 효창공원 일주로 걷기 짬바가 있는 선배에 비해 나는 걷기 노비스... 아니... 신생아... 아니, 차라리 수정란에 가까운 상태라고 보는 게 적합하겠다. 태어나서 이만큼 살았으면 그 긴 시간 동안 늘 앉아있거나 누워있지만은 않았을 것 아닌가. 적어도 일정한 비율로 서고, 걷고, 달리고, 그러고 살았을 텐데. 이제껏 내 삶에서 걷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까지 적었단 말인가 싶을 정도로 오래 걷기에 취약한 나 자신을 올레길 걷기 도전 첫날 깨달았다. 하긴, 서울에 있을 때는 하루에 만 보 이상 걷는 날도 드물었으니까.


그래도 걷고 싶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진 않지만, 여행으로 와서 부족한 시간을 핑계로 한 번도 제대로 걸어보려는 시도조차 안했던 예전과 다른 뭔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배언니의 올레길 걷기에 동참하기로 했고, 아침부터 차를 몰아 성산으로 달려갔다. 뭐든 순서대로 하는 게 제일 좋지, 그렇게 말하면서 1코스부터 정복하기 위해 우리가 찾은 곳은 올레길 1코스(시흥~광치기 해변)의 시작이자 패스포트를 판매하는 말미오름 안내소였다.

올레길 1코스가 시작되는 말미오름 초입에 위치한 안내소
그리고 개당 2만원짜리 올레 패스포트. 이런 거 다 상술이야~ 하면서도 하나쯤은 기념품 삼아 사게 되는 마음. 그리고 사두니까 계속 걷게 되긴 하더라... 

신나게 스탬프를 찍고 나서 눈에 보이는 저 소요시간과 거리. 15.1km... 이렇게 걸어본 적이 있나? 굉장히 침착해진 상태로 일단 첫 코스인 말미오름에 올랐다. 산세가 그리 가파른 것 같진 않았는데도 불과 몇 분 걸었다고 금세 호흡이 가빠졌다. 아이고 내 횡격막! 아이고 내 폐! 그러나 막 힘들어 죽을 정도는 아니고 숨 쉴 때마다 얼굴이 좀 빨개지는 정도라 씩씩하게 걸었다. 배언니랑 실없는 소리도 해가면서. 대체 이 오름과 산에서 휘리리리-릭, 삐익! 하고 우는 새 이름이 뭘까 내내 궁금해하며 말미오름을 휘우듬 걸어 마치니 눈 앞에 알오름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음, 괜찮아, 이 정도는 할 만해. 알오름으로 가는 길도 경사는 그리 가파르지 않아서 오를 만했고 또 생각보다 짧아서 순조롭다... 고 느꼈다.


오름을 내려오자 평지 같은 길이 이어졌다. 종달리 소금밭을 향해 걸어가는 길은 야트막한 돌담들과 봄처럼 노랗게 핀 유채꽃이 풍성해 눈도 마음도 즐거웠다. 걷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기보단, 사방을 끊임없이 둘러보며 이제껏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감각들에 나를 내맡기는 경험이 즐거웠다. 어라, 그런데 이 길 좀 눈에 익네. 가만히 생각해보니 2년 전, 제주도 여행에서 용눈이오름 갈 때 차로 지나쳤던 길이다. 심지어 그 때 고등어 구이 혼밥했던 식당도 찾았다. 괜히 반가워 배언니에게 조잘대며 소금밭 길을 따라 쭉쭉 걸어내려갔다. 


종달리 해안을 따라 송난포구까지 걸어가는 길은 탁 트인 성산 앞바다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더더욱 걸을 만했다. 파도 대신 잔물결이 이는 수면은 평온했고 그 위로는 마침 더없이 좋은 날씨 덕에 수면에 난반사하는 햇살들이 촘촘히 아름다웠다. 해안에 주렁주렁 매달려 말라가고 있는 한치 무리를 지나쳐 걷고 또 걷다가 중간지점 스탬프를 발견한 건 아주 운이 좋은 우연이었다. 조금만 한눈 팔았어도 중간지점 스탬프는 찍지도 못하고 돌아왔을 거다.


여기가 갈매기 기준 맛집입니까?

갈매기들이 바다 위, 해안가에 솟아오른 거무튀튀한 현무암 위에 떼지어 앉아있는 것을 보며 여기가 얘네 핫플인가 보다, 물맛이 아주 맛집인가 보다 따위의 아무말을 해대며 송난포구에 도착했을 무렵쯤 살짝 위기가 왔다. 2년 전 겨울 제주도에 왔다가 금이 간 왼쪽 발목이 아주 희미하게 통증을 호소했다. 양쪽 정강이도 안 그러던 애가 대체 왜 이러느냐, 무슨 일이냐, 이렇게 걷다니 제정신이냐 같은, 심히 당황스러워하는 시그널을 보내왔다. 요컨대 슬슬 다리가 무거워졌다는 얘기다. 오조 해녀의 집을 지날 무렵 아, 밥이라도 먹고 움직이면 좀 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여기서 주저앉아 밥을 먹어버리면 일출봉은 절대 못 올라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기랄, 나는 나를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계속 걸었다. 


다행히 아름답게 펼쳐진 성산 앞바다의 풍경은 다리의 피로를 어느 정도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바다를 보면 됐다. 캬, 진짜 예뻐도 너무 예쁜 바다인 거야. 물가에 살면 우울해진다지만 그럴리가 있나, 나는 아무래도 물이랑 찰떡인가보다, 뭐 그런 헛소리를 배언니에게 하며 얼마를 더 걸었을까. 오징어잡이 배들이 몰려있는 오조항이 나오고, 한도교를 지나 드디어 일출봉이 있는 성산리로 진입했다.

유채꽃 너머, 수평선 너머

한도교를 넘자마자, 성산포항 여객터미널을 찾는 아주머니 한 분에게 길을 알려드리고 카카오맵 도보 경로 보는 법까지 알려드리는 착한 일을 해서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제주 한달살기를 하면서 결심한 게 하나 있는데 그건 지극히 사소한 일에도 자주 감탄하자는 거였다. 아름다운 것, 멋진 것, 착한 것, 예쁜 것, 조금 어이없는 것, 웃긴 것... 가리지 않고, 아무리 사소해도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탄하자는 거. 그 목표에 충실하게 나는 내가 베푼 아주 사소한 선행에 한껏 만족스러워하며 걷는 동안 달라지는 제주의 바다빛깔 하나에도 요란스레 기뻐했다. 그렇게 터미널을 끼고 돌고 돌아 마침내 일출봉을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성산 일출봉. 이름만 많이 들어보고, 제주 관련 영상에서 옴폭하니 패인 넓은 분화구 위를 뒤덮은 녹색빛깔만 보던 그 봉우리가 눈 앞에 제법 거대한 면모를 드러낼 무렵. 사실 난 꽤 지쳐있었다. 열과 땀이 많은 체질이라 얼굴은 이미 시뻘개져 있었고 다리는 안 하던 짓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서 쉬라는 경고를 계속 보내오고 있었다. 참으로 유혹적이게도, 성산 일출봉은 성인 1인당 5000원이라는 이 동네 기준 제법 비싼 입장료를 자랑했다. 아, 입장료까지 내면서 들어가야해? 굳이 저긴 안 올라도 되지 않을까? 올레길 코스도 일출봉 오르는 건 포함이 안된 거 같은데... 마음 속으로 나 자신을 위한 핑계거리를 오조오억개쯤 만들고 있을 때, 배언니가 밝은 얼굴로 앞장 서서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여기까지 온 김에 가보는 거지 뭐. 이왕 왔는데 안 올라가면 그것도 후회될 걸.


후회는 일출봉을 오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이미 13km 가까이 걸어오는 동안 주인의 낯선 운동 행위에 적잖이 당황해 팅팅 불어있던 허벅지와 정강이는 중력을 이기고 굳이 위로 올라가겠다는 이 미친놈의 행동에 격렬한 반대 의사를 표했다. 허벅지에서 둔통이 느껴지고 정강이가 쑤셔왔다. 계단은 어찌나 그렇게 많은지. 문득 알오름에서 내려온 뒤 “오름이 초반에 배치돼서 다행이다”라며 천진난만하게(...) 말하던 내게 배언니가 웃으며 해준 말이 기억났다. 


일출봉이 해발 고도는 그렇게 높지 않은데,
계단이 많아서 올라갈 때 힘들더라구.


계단은... 정말로 많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일출봉을 오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헉헉대고 헥헥대며 계단을 오르다가 몇 번이나 멈춰서 삼다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름을 오르면서 과격하게 팽창과 축소를 반복했던 횡격막이 다시 나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와, 씨, 죽겠, 흐어어...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동안에도 약간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내 체력이 이렇게 저질이었나?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대신 네 발로 기어 올라가면 조금 더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힘겹게 한 발 한발 옮기던 내 눈에 ‘남은 거리 208m’라는 팻말이 보였다. 아, 이제 얼마 안남았구나! 땀을 줄줄 흘리며 배언니를 돌아본 내가 팻말을 가리키자 언니는 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게된 건 조금 뒤였다.


진짜 반 죽고 싶은 기분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계단을 몇 개나 더 올라갔을까. 이제 진짜 거의 다왔겠지? 하는 생각을 할 무렵 팻말 하나가 또 눈에 들어왔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 140m’. 나도 모르게 입에서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계단, 계단, 계단, 그리고 저 멀리 아주 푸르고 아름다운 수평선과 성산항의 풍경들. 와, 나 돌겠네. “겨우 60m 왔다고?”


세상이 날 속이는 건지, 일출봉이 날 속이는 건지 뭔지는 몰라도 이건 너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단순 계산으로도 이 지옥같은 60m를 최소 두 배 이상 걸어올라가야 정상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제와서 돌아 내려갈 수도 없고. 거의 세기말급 재난을 맞은 사람의 몰골이 되어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서 맞닥뜨린 성산 일출봉 정상, 분화구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보다는 뭔가 좀 더 복잡미묘한 기분을 안겨줬다. 최종/최종의최종/최종의최종_final 같은 느낌으로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의 마지막 하나를 밟고 올라서 만난 성산 일출봉의 풍경 앞에 나는 옆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건 굉장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경험이었다. 나는 누군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이렇게 헉헉대는데, 누군가는 이 길에 계단을 만들고 데크를 깔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나는 그 데크 위에 늘어진 채 아주 옛날, 마그마가 터지고 흘러 깨져버린 섬 위에 자라난 새파랗고 푸릇한 자연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농담 삼아 거대한 분화구를 바라보며 “호연지기가 절로 생길 풍경”이라 평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어떤 감정이 저절로 생기는 오묘한 풍경이었다. 자연이 낳아 빚고 시간이 기른 곳에 앉아 한낱 인간인 자신이 뭐라도 된양 내려다보고 있는 지금이 견딜 수 없이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해풍이 이마에 남은 땀을 훑어가게 내버려두는 동안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나는 처음 올라온 일출봉의 정상을 머리에 새겨넣으려 한참이나 애를 썼다. 결과는... 글쎄, 십년 이십년 후의 내가 이 순간을 떠올려볼 때 알게 되겠지. 어쩌면 그 때 이 기억이 희미해지면 다시 올라오고 싶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출봉에서 내려오는 길에 내려다 본 광치기 해변

올라오는 길은 힘들어도 내려오는 길은 언제나 순식간이다. 가파르게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오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삭. 주차장을 지나 스타벅스로 직진한 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 손에 들고 나왔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여기까지 걸었으니 우리의 위장은 거의 무장봉기를 할 태세였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이 너무 피로해 위장도 적극적인 스트라이크 활동은 벌이지 않고 있었다. 


맛집 따위를 찾을 여력이 없었던 우리는 최대한 동네 사람들이 많이 갈 것 같은 허름한 집을 골랐는데 결과는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거북식당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그 식당은 한창 점심 때가 지난 다음이라 그런지 손님이 아무도 없었고, 우리는 꽤 여러 가지가 써진 메뉴판을 바라보다 지친 목소리로 성게칼국수와 성게비빔밥을 주문했다. 반찬으로 멸치조림이 나와서, 갑자기 이 맘 때 멸치가 한창일 기장이 잠시 그리워지기도 했다가 빠르게 서빙되어 나온 식사에 곧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결론적으로, 나란히 12000원이었던 우리의 성게 페어는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끝났다. 내 성게비빔밥에는 성게가 제법 있었고 맛도 고소했는데 배언니의 성게칼국수에는 성게의 향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묵념합시다.


그래도 일단 배를 채우고 나왔더니 지친 다리에 조금 힘이 돌았다. 이제 광치기 해변까지 쭉 걷기만 하면 되니까 부담도 줄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넋두리처럼 나누며 다시 걷고 또 걸었다. 대로변을 따라 걷다보니 4.3 유적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었다. 터진목. 4.3을 조사할 때 이름을 본 기억이 있다. 성산과 구좌의 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이다. 


급격히 무거워진 마음으로 터진목으로 들어선 나는 추모비 앞에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두고 간 초코파이 세 개가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성산읍 유족회의 이름으로 바쳐진 꽃바구니가 있었다. 올레길을 걷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비극의 장소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는 올레길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때 먼저 4.3 투어를 했기 때문에 이 장소들이 오히려 눈에 익었다.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목례한 뒤 다시 올레길 코스를 따라 광치기 해변까지 걷는데, 철이 철이다보니 오름에서도 보지 못했던 말 한 마리가 길막을 하고 선 채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줄에 매여져 있었지만 일단 먹는데 너무 열중해있던 터라 인간들이 자기를 찍어대며 옆을 지나가는데도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리가 만무하지만 너 잘생겼다, 같은 쓸데없는 칭찬을 몇 번 던져준 뒤 말을 뒤로 하고 조금 더 걷자 마침내 1코스의 종점인 광치기 해변의 끝이 나왔다. 배언니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미약하게 기쁨을 나눴다. 하나를 해냈다는 성취감은 매우 컸지만 동시에 매우 피곤했으므로, 빠르게 스탬프를 찍고 그대로 광치기 해변가에 앉아 물멍을 시작했다. 


차를 세워놓은 시작점까지 돌아갈 201번 버스가 오려면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지친 다리를 쉬게 할 수 있었다.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과 바림돼 부옇게 된 수평선과, 이끼가 잔뜩 낀 녹색의 용암 빌레, 그 위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없는 사람들을 한가로이 바라보다 결국 벌러덩 대자로 드러누웠다. 하루종일 걷느라 내내 긴장해있던 내 척추기립근이 그제야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변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익숙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푸른색으로 시야를 가득 채웠다. 

광치기 해변에 누워 올려다 본 하늘

햇빛이 제법 따가워질 때까지 그러고 있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카카오맵은 제주 버스 도착 알람 서비스까지 제공해주고 있어서 새삼 혀를 내둘렀다. 심지어 꽤 정확해... 무서운 놈들. 시간 맞춰 도착한 201번 버스에 몸을 싣고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시흥리 정류장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여 남짓. 네 시간 조금 넘게 걸어온 길을 생각하며 다리를 주물렀다. 


물론 끝을 따라 돌고 돌아 걸은 길이라 단순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시흥리 정류장에 내뱉어지듯 내린 우리는 오름 등산객 아니면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몇몇을 뒤로 하고 차를 세워놓은 올레 안내센터 쪽으로 또 하염없이 걸었다. 처음 코스를 시작했을 때보다 어두워진 오후 시간대의 공기가 사뭇 낯설었다. 


몇 분을 더 걸었을까, 세워놓은 차 앞에 도착한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조금 식었던 땀이 다시 송송 맺힌 것을 손등으로 쓸어냈다. 피곤에 지친 다리가 여지없이 후들거렸다. 꼭 갓 태어난 아기 기린같은 꼬락서니로 걷던 자신을 떠올리자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었다. 


올레길 1코스 종주 완료!

그래도 1코스를 마친 기념으로 안내 센터에서 와팬 뱃지를 하나 샀다. 종점 스탬프와 같은 모양인 시흥초등학교 그림의 와팬 뱃지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차에 올라타니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집으로 가서, 씻고, 기절하면 된다. 그날 밤은 아주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죽음과 유사한 가사 상태에 빠져 정신없이 잠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는 아니지만 혼저옵서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