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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밋너 Feb 27. 2023

혼자는 아니지만 혼저옵서예

2021년 3월 어느날들, 그리고 혼저옵서예는 어서오세요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인 일정을 결정하지 않은 채, ‘제주도에 한 달 살기를 하러 가겠다’는 대략적인 계획만 세운 상태에서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해야 하는 일이 없고, 마땅히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하면 좋겠다, 싶은 일들이나 찾아보는 날들이 그 뒤로 며칠 더 이어졌다.  


그래도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우스갯소리 있듯이, 사이사이 바쁜 시간들은 이어졌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여기저기서 만나느라 꼭 일할 때만큼 힘들었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석관동의 한 카페에서 전(前) 축구기자 모임을 하나 가졌다. 축구계에는 여성 기자가 드문 편인데, 그 안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다가 각자의 이유로 기자를 그만 둔 배언니와 문사장을-문사장네 카페에서-만나기로 한 자리였다.  


“저, 제주도 가서 한 달 살기 하려고요.” 


어디든 입방정을 떨어놔야 그게 현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나의 계획을 말했을 때 배언니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가려고?” 

“음,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해봤는데, 4월쯤요?” 

“되게 좋은 생각 같은데? 너만 괜찮으면 나도 같이 가고 싶다.” 

“어… 가실래요? 저야 좋죠!”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나눈 대화였기 때문에, 나는 이 대화가 ‘언제 밥 한 번 먹자’ 수준으로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다고는 해도, 서로 일정을 맞춰서 같이 한 달이나 지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배언니는 내게 너무 까마득한 선배였다. 어느 정도로 까마득하냐면 축구 기자 경력 2n년의 자타공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며, 내게 하늘같았던 선배들이 깍듯하게 모시는 선배가 바로 배언니였다. 이 험난한 판 안에서 같은 여자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2018 러시아 월드컵의 희로애락을 같이 경험하며 친해지긴 했지만 그것과 한 달 살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심지어 나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툰다거나, 서로의 감정에 신경 써야 하는 과정들이 지독하게 귀찮아서 여행도 혼자 다니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 다른 일 때문에 배언니와 다시 만났을 때, 언니가 “우리 언제쯤 내려가는 게 좋을까?”라고 넌지시 묻는 말에 잠시 동공이 흔들렸다. 배언니와 함께 가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이게 정말 성사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러시아에서의 우리(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배언니(왼쪽)가 열심히 나를 찍어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내가 지레 걱정한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진행됐다. 정신을 추스르고 날짜를 맞추는데 집중하자 나머지 과정은 오히려 생각보다 간단하게 흘러갔다. 나는 5월 전에만 서울에 돌아오면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내 일정과 배언니의 정해진 일정을 맞춰 날짜를 더하고 깎아나가며 3월 15일 출발, 4월 12일 복귀라는 한 달 약간 못 미치는 일정이 확정됐다. 스마트폰의 캘린더 앱에 일정을 표시하며 조금 얼떨떨해하던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출장 다니면서 항공권을 속전속결로 끊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던 우리는 일정이 정해지자마자 비슷한 시간대로 김포↔제주 왕복 항공권을 냅다 끊었다. 항공권까지 끊고 나니 제주도에 무려 한 달을 살기 위해 가긴 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들어 e-Ticket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기묘한 고양감이 온몸에 피어올랐다. 


항공권 다음으로 빠르게 결정해야 했던 건 집과 차였다. 제주도 한 달 살기 붐이 일었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에어비앤비는 물론이고 한 달 살기 카페, 숙박 플랫폼 등 다양한 루트로 제주도 각지의 한 달짜리 집을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산간 지역 독채를 빌리려고 했는데, 나보다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도에서 보름 정도 지내다 올라온 Y선배가 술자리에서 매력적인 조언을 건넸다. 


“오피스텔을 찾아봐. 요즘 공실로 나온 오피스텔이 많아서, 한 달 살기용으로 내놓은 곳도 꽤 될 거야. 냉난방이나 편의시설 같은 걸 생각하면 오피스텔이 훨씬 나을걸?” 


오피스텔이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옵션이었는데. 당연하다. 제주도 한 달 살기라는 말 뒤에는 목가적인 전원 생활에 대한 동경, 제주식으로 지어진 집에서 제주의 삶을 ‘체험’하는 특별한 경험, 아니면 아기자기하게 꾸며진-소위 말하는 ‘갬성’적인 느낌의 숙소에서 책 한 권 펼쳐놓고 사진을 찍는 모습 따위가 오퍼시티 70% 정도로 덧칠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살러’ 간다고 생각하자 Y선배의 조언은 대단히 합리적으로 들렸고, 오피스텔 하나에 방만 따로 잡아 산다면 배언니와 내가 한 집에서 따로 방을 쓰면서 공유해야 하는 것들-화장실이라거나, 화장실이라거나, 화장실 같은 것들-에 대해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으로 여겨졌다. 


몇 차례의 검색 끝에 우리의 조건에 맞는 숙소를 골랐고, 3월 비수기였던 덕분에 꽤 괜찮은 가격에 예약을 마치고 나니 이미 마음은 제주도 서귀포시 내 숙소 침대 위였다. 달력 앱에 표시해놓은 날짜만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다가 해치워야 할 또 하나의 과제, 렌트카에 생각이 미친 건 숙소 예약을 마치고도 이틀 뒤나 지나서였다. 


한 달 살기가 고유명사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한 달 살기를 하고 있어서, 당연히 렌트카도 한 달 살기용 수요가 제법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내 착각이었다. 한 달 살러 오는 사람들은 중장기 렌트 대신 자차를 가지고 내려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다소 번거롭기는 하지만, 서울 기준으로 인천에서 선박에 탁송을 맡긴 뒤 비행기로 내려오거나 아니면 목포나 여수, 완도까지 자차로 내려와 차는 탁송하고 배를 타고 입도하는 방법을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듯 했다.  


그래서인지, 숙소를 신속하게 찾아내고 예약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렌트카 검색에 나선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한 달짜리 렌트카를 빌리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렌트카 사이트 방문, 원하는 차종 넣고, 픽업 장소 넣고, 날짜 넣고, 어라? 여기서부터 막히기 시작했다. 날짜 선택부터 한 달이 안 되는 곳이 많았고, 시스템에서 검색은 된다 쳐도 나오는 매물이 없었다. 어라? 어라? 바보 같은 어라?만 반복하며 최첨단 디지털 인터넷 세상에서 빠져나와 좀 더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전화하기. 


어렵사리 구한 나의 한 달짜리 렌트카. 양카 중의 양카 소리 듣는 K5 그것도 흰색 '허'의 운명...을 이땐 몰랐지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을 거쳐 몇몇 군데를 더 알아보고, 수많은 제주도 한달살기 카페를 뒤져 제휴 업체 여기저기에 견적을 문의하다가 겨우 한 군데에서 괜찮은 가격의 한 달짜리 렌트카를 빌릴 수 있었다. 아마도 필연적으로, 연식이 상당한 녀석이겠지만 그래도 일단 합리적인 가격에 한 달짜리 차를 빌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한 시름 내려놓은 셈이다. 이제, 정말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은 이미 렌트카를 타고 제주도를 두세 바퀴 쯤 돌면서 잠들기를 열 몇 번 반복했더니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제주도로 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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